수필

일체유심조, 불교의 가르침

圓鏡 2020. 10. 14. 07:10

오늘은,

모처럼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석두스님의 법문이 떠올랐다. 지난 일요법회는 내가 집전을 하였고, 법상 바로 앞에서 들었던 법문의 제목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였는데, 그 해답은 '일체유심조'인것 같다.

 

 

(1) 고통은 누가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는 것이다.

 

어떠한 한 가지 현상이나 상황을 놓고 보면,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 현상을 받아들이는 내용은 같을 수도,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엄격하게 보면 모두 다르다. 그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가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고통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므로, 고통이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 그 상황과 현상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어떤 과정(filter)을 거쳐서 사실을 왜곡하게 되는 것이다. 그 필터는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우고, 특히 보고 듣고 경험한 바이다. 그런 상황에 부닥쳐 본 경험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었느냐에 따라서 느낌과 생각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필터를 거쳐서(왜곡해서) 본다. 그래서 불교 수행자는 있는 그대로 현상을 바라볼 줄 아는 정견正見이라는 수행(위빠사나)을 하는 것이다.

 

 

(2) 에는 共業私業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共業을 가지고 태어난다. 은 태생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미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사람들과 아프리카 빈국에 태어난 사람들은 국가별로 共業을 가진다. 미국인으로 살아가면서 받게 되는 그 무엇이 있고, 아프리카의 빈국에서 국민으로서 살아가며 받게 되는 그 무엇이 바로 共業이다. , 그 집단의 모든 구성이 공통적으로 받게 되는 이다. 어떤 지역,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그 집단 구성원들이 모두 받게 되는 것이 共業이다.

 

특히, 한국인이라면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는 달리 남한과 북한이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념적으로 대치한 상황에서 겪게 되는 부담이 있다.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을 가지게 되고,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런 共業도 윤회사상에 근거해서 전생으로 거슬러가 보면, 개인적으로는 私業이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는 선조 임금의 요청으로 승병을 일으키게 된다. 그 당시 이런 승병의 역할로 호국불교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한 승병들은 국가와 국민을 구한다는 善業(共業)을 쌓는 한편, 오계를 어기는 惡業(私業)도 쌓게 된다. 그러나 이 私業에 대해서는 차후 개별적으로 과보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업의 논리이다. 한편, 승병으로 이런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에는 개차법開遮法이 있다. 계율을 어기게 될지라도 처한 상황에 따라서 불살생의 계율을 일시적으로 어길 수도 있다는 것이 개차법이다.

 

중생은 살아가면서 실수를 할 수 있다. 즉 누구나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잘못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사자가 그 잘못을 인정하고 과보를 달게 받겠다고 맘먹는 순간 생각보다 과보가 적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과보()는 훨씬 크게 느껴진다. 이 양자 중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당사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요즈음 국정감사를 통해서 고위 공무원들이 겪고 있는 인과응보를 보면, 지혜롭지 못한 그 한 사람이 이기적인 선택을 함에 따라, 온 국민의 마음이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3) 생각을 멈추면 보인다.

 

비유하자면 차가 시속 200Km로 달릴 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그 차량의 브랜드를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 차가 시속 20Km로 달리거나 정차한 상태에서는 그 브랜드를 알아볼 수 있다. 이러하듯 사람이 생각을 멈추면 해답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그런 생각을 멈출 수 없을뿐더러, 일상생활을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례로써, 투명한 유리병 속에 든 흙탕물을 가만히 놔두고 보아라. 시간이 지나면 흙탕이 가라앉아 유리병을 통해서 건너편이 잘 보일 것이다. 유리병을 흔들지 말고 가만히 놔두어라. , 생각을 멈추어보라. 내려놓고 객관적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아라. 그러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이다. 그 상황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 생각을 멈추면 답이 보인다.

 

스승과 제자가 선문답하는 가운데, 스승이 제자에게 할!! 하면서 큰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있다. 이것 역시, !! 하는 그 순간 제자가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면서 생각(질문을 내려놓고)을 멈추면서, 다른 생각을 하게 하여 한 소식( 깨달음, 다른 생각, 힌트 )을 하게 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마음을 비워라. 생각을 비워라.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생각(현상을 왜곡하는 필터 역할)을 내려놓음으로써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런 비유도 있다. 제자가 스승에게 진지하게 지옥에 대해서 질문을 했더니, 스승이 제자의 뺨을 느닷없이 내리친다. 그 순간 제자는 황당한 순간을 맞이하면서 마음을 비운 상태로 멍하거나, 바로 분한 마음()이 일어나면서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그때 스승이 제자에게, 야 이놈아 지금 네 맘이 바로 지옥이다. 이어서 제자가 스승의 행동에 대해 이해하고 마음이 풀어지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 스승은 야 이놈아 지금 네 맘이 극락이라고 답한다.

 

 

(4) 서산대사가 제자의 질문에 대해 답한 게송

 

* 붓다가 어디에 있습니까?

네 마음이 부처다.

삼악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네 마음속에 있다.

 

, 지옥과 극락을 멀리서 찾지 말고, 지금 여기서 찾아라.

 

 

*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번뇌의 마귀

붓다의 세상에서는 이러한 마귀도 없다.

모든 현상은 모두 환상이다.

 

, 무엇인가 일어나는 마음이란? 분별심을 의미하고, 분별심은 반드시 나에게 좋고 나쁨을 판단하게 되어 있다. 중생에게 일어나는 생각은 이기적이고 분별하는 마음이므로 모두 쓰레기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세간에서 배우고 익힌 지식, 그리고 똑똑한 사람은 불교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오히려 어리숙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생각을 적게 하기 때문이며 겸손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믿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기 생각이 적기 때문이다.

 

 

(5) 불교 공부하는 지혜

 

모든 것을 줄이고, 비움으로써 행복을 찾게 되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무엇인가 하나라도 더 배우고 익혀서 채워야 하기에 불교는 逆行하는 삶을 가르치고 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생활용품)이든 정신적인 것(지식, 사상)이든 모든 것을 내 주변에서 줄여라. 비워라. 그럼으로써 내 삶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절에 오래동안 다녀도 내 생활에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내가 비우지 않고 줄이지 않고, 지금의 내 것을 그대로 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큰 스님에게 수년 동안 깨달음을 얻겠다고 시중들면서 함께 살아도 깨달음()에 대해서 직접 알려주지 않는다. 반복되는 일과에다 심부름만 시킨다. 왜냐하면 를 말로 하기도 어렵지만 이것이 라고 가르쳐주면 가르쳐준 그대로, “이것이 라는 고정된 에 집착하여 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에,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깨우치게 놔두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진짜 를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다.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어른은 고정관념인 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이러한 이 없다. 그래서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래서 가끔 엉뚱한 사고도 친다. 이런 면에서 붓다(선사)는 어린아이와 같다. 고정관념에 벗어나 있기에 현상에 따라 다양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중생은 고정된 관념에 얽매여 있어서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단답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6) 삶의 지혜, 병에 든 흙탕물 비유

 

병 속에 흙탕물이 들었을 때, 가만히 놓아둬 보아라. 시간이 지나면 흙탕물이 가라앉게 되면 투명한 병과 물을 통해서 건너편이 잘 보일 것이다. 그러나, 병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보겠다고 병을 이리저리 돌려보면 흙탕물이 가라앉지 못하고 계속 뿌옇게 되어 있을 것이다.

만일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상대방에게 간절하게 꼭 이 말만은 해주고 싶다고 할 때(설명.설득 목적), 그 말을 멈추고 입을 굳게 다물고 그 상황을 지나가 보라.

내가 할 말을 상대방에게 던지면,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상대방의 몫이다. 상대방이 어떻게 해석하느냐? 에 달려 있다. 내가 아무리 설명을 잘하려고 해도 상대방이 받아들일 분위기가 아니면, 입을 꾹 다물고 물러서서 지켜보는 것이 사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축생은 번식과 먹는 것(먹을 것으로 찾는 것)이 전부다. 이것은 본능적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도 이 두 가지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에게 다른 한 가지가 더 있는데, 그것은 상상력(생각하는 능력)이다. ....주의 마음은 어리석은 마음이고, 어리석은 마음은 축생의 마음과 같다. 이 생각하는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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