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나이와 죽음, 그리고 윤회

圓鏡 2019. 5. 19. 09:59

어제는 처 조카 결혼식이 여천에서 있었다. 그 먼 거리를 ktx편으로 3시간 이내에 이동하였다.
오래 전에 돌산도에 있는 향일함 성지순례차 여수를 들렀던 적이 있었지만, 여수에는 자주 갈 일이 없다.
여천 에너지공단에 직장을 가진 조카는 사택에 신혼살림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제 나도 손자가 생기고 주변에 아들 조카들이 결혼을 하는 것을 보니, 내 나이 들어감을 느낄 수가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매일 보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모습, 그리고 조금씩 달라져감을 느끼는 건강을 통해서
내가 나이 들어감을 느낄 수 있다.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빠르게 지나간다는 말은 이렇게 내 몸과, 내 주변의
변화하는 모습을 지표로 삼아 체감할 수 있다.

마침내 죽음에 이르리라. 요즈음 수명은 아흔과 백세를 바라보고 있다. 아울러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
이런 수명은 고통을 길게 가져갈 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버린 채 목숨만 연명을 하다보니,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국가로 가서 죽음을 선택하는 이도 있다는 뉴스를 접할 수 있는 것이 요즈음 세태다.

매일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명백하고 인지하고
삶을 살아간다면, 그 삶은 보람있게 알차게 꾸려가는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무한정 살 것처럼 착각하고 산다면, 여유로움을 넘어서 삶이 너무 느슨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유한한 인생이라고 해서, 너무 많은 일거리를 소화시키려고 한다면, 인생을 헉헉거리면서 숨가쁘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만사가 내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양자간에 조화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현명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런 생각은 잠시 생각해보는 이성적, 이론적인 것이고, 사실 사람은 "습관"에 따라 산다. 한 번 든 습관은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불편하지 않다. 그대로 변함없이 반복해서 살아가는 것이 편하다. 그래서
습관이 무섭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그 습관이 業生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불교의 윤회에서 말하는 그 業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후
윤회를 한다고 하는데, 육신이 윤회(부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제8식 아뢰야식)이 윤회를 한다고 한다.
그 때 그 의식이 바로 業이라면, 그 업이 습관이라면 어떨까? 결정론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다. 그 습관(=업=의식=아뢰야식=운명=결정론)을 불교적 수행을 통해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나의 운명을 내가 개척한다고 한다. 나의 운명에 따라 내가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결정론이 아니라, 그 운명은 나의 수행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운명으로 바꿔가는 것이 불교수행이다.
아무튼 시작은 조카 결혼식으로 시작했는데, 습관과 업생과 운명론까지 이어졌다. 잠시 나의 지식을 정리해
보았다.

내주에 있을 영업고객상담 강의 준비를 하자.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