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혹론 牟子理惑論은 중국 최초의 불교관련 저작으로 '모융'이 저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南朝시대 僧祐가 편찬한 弘明集에 수록되어 있다. 즉 불교 전래가 중국사회에 미친 영향과 반박을 싣고 있다. 공자나 노자의 논점을 인용하여 불교를 옹호하고, 유교.불교.도교 정신의 일치를 주장하고 있다.
중국에서 불교교단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토착신앙과 종교와의 사상적 대립이 심화되었다. 특히 도교와는 사상적 대립을 넘어 북위 태무제와 북주 무제의 폐불과 같은 불교탄압이 강행되고 흥망성쇠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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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시대 이후 불교가 급속히 성장세를 보이면서 다양한 문제가 속출되기 시작했다. 남북조시대 특히 남조에서 불교와 유교 사이에 가장 크게 쟁점이 된 것은 神不滅(신불멸)과 인과응보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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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멸론이 중국불교에 처음 등장한 것은 후한말에 모자(牟子)가 지은 <모자이혹론(牟子理惑論)>에서 이며, 진대(晉代)에는 축승부(竺僧敷)가 <신무형론(神無形論)>을 지어 신멸론(神滅論)을 반박하였다. 하지만 신불멸론을 체계화한 것은 혜원이다. 혜원은 육체는 멸해도 정신은 불멸한다고 하여 당시의 신멸론을 부정했다. 그는 정신이 궁극에 도달하면 신령하고 미묘하여 육체와 신이 함께 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육체와 정신은 완전히 분리된 두 개이며, 神은 신체보다 신령스러워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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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범진(范縝, 450~515)은 신형상즉(神形相卽, 정신과 육체는 하나이다)하여 신체와 정신은 불가분리이며 공생공멸(共生共滅, 같이 생하고 같이 멸함)한다고 하여, 칼날과 칼의 날카로움과 같은 관계라고 주장했다.
불교와 도교의 논쟁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교도들은 노자가 사라진 후 인도에 가서 오랑캐(인도사람)를 교화하였으며, 노자가 붓다(석가모니)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4세기 초 왕부(王浮)에 의해 <화호경(化胡經)=오랑캐를 교화>으로 정형화되었다.
도교와의 대립은 사상적인 논쟁에서 끝나지 않고 불교의 탄압으로 이어졌다. 북조에서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폐불의 원인은 모두 도교와의 마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위 태무제와 북주 무제에 의한 폐불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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