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전래와 역경사업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다소 전설적인 것으로는 ≪위략 魏略≫의 서융전(西戎傳)에 나타나며, 그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2년에 대월지왕(大月氏王)의 사자 이존(伊存)이 불교를 전수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65년에 후한 명제(明帝)의 이복동생인 초왕영(楚王英)이 황로(黃老)와 함께 불교를 믿었다고 한다.
이 같은 기록에서 불교는 서력기원을 전후하여 무역로인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의 북쪽 황하유역에 전수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50년대에는 안식국(安息國)에서 온 지루가참(支婁迦讖)이 ≪반주삼매경 般舟三昧經≫이라는 대승경전을 번역하였다. 당시의 역경승(譯經僧)들은 인도·대월지국·안식국·강거국(康居國)에서 온 이방인들이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거꾸로 구도(求道)와 구법(求法)을 위하여 서역으로 향하였다. 위나라의 주자행(朱子行)을 비롯하여 많은 순례승들이 서역을 찾아나섰다.
처음 북부지역인 뤄양(洛陽)·장안(長安)에 전래되었던 불교는 그 뒤 역경승 지겸(支謙)이 오나라의 서울 건업(建業)에서 포교하고, 월남에서 북상한 강승회(康僧會) 역시 오나라에 들어와 포교에 종사함으로써 점차 남부중국에까지 교세를 확장하게 되었다.
특히 불도징(佛圖澄)은 중앙아시아의 구자국인(龜玆國人)으로서 신통력과 주술로 사람들의 신앙을 얻었고 국왕의 고문을 지냈다.
그의 제자 도안(道安)은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의 신임을 받아 경전목록과 중국인 출가자를 위한 생활규범을 작성하였다. 또 도안의 제자 혜원(慧遠)은 여산(廬山)에서 백련사(白蓮寺)를 짓고 염불 중심의 결사운동(結社運動)을 전개하였다.
특히 혜원의 ≪사문불경왕자론 沙門不敬王者論≫은 불교의 보편주의와 중국의 민족주의가 대립하면서 불교가 중국적 풍토에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호교적 논설이다. 또한 서진시대(西晉時代)에는 축법호(竺法護)가 ≪정법화경 正法華經≫·≪광찬반야경 光讚般若經≫ 등을 번역하였다.
이 무렵 중국의 일반 사상계에서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이 성행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불교를 노장사상에 의하여 이해하려는 풍조가 현저히 나타났다.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하는데, 불교사상의 공(空)을 노장사상의 무(無)와 대비하여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격의불교의 특징이다.
이는 불교가 중국에서 정착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고, 동시에 중국 사대부층이 불교에 접근하는 길을 터놓은 것이다. 또 불교의 윤회사상이 도입되어 전생·현생·내세에 대한 인과응보 개념이 중국인의 생활에 깊이 뿌리를 내린 것도 이때였다.
중국불교의 역경사(譯經史)나 사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인물은 구마라습(鳩摩羅什)이다.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소승불교를, 나중에는 대승불교를 공부했던 그는 ≪대품반야경≫·≪금강반야경≫·≪묘법연화경≫·≪유마경≫·≪아미타경≫ 등의 대승경전과 용수의 ≪중론≫·≪십이문론≫ 등 중관학파(中觀學派)의 논서들을 번역하였다. 특히 중관사상은 그의 한역(漢譯)을 근거로 중국에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제자 승조(僧肇)는 ≪조론 肇論≫을 저술하여 중국인이 이해한 공사상을 피력하였다. 이 ≪조론≫의 영향은 당대 이후 중국불교사상계를 풍미하였고, 구마라습이 번역한 ≪중론≫·≪십이문론≫은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을 전개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동진시대(東晉時代)의 역경승이었던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는 후대 화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된 ≪화엄경≫을 번역하였다.
담무참(曇無讖)은 ≪열반경≫을 번역해서 중국불교에 ‘일체의 중생에게는 모두 다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사상을 전래하여 불성설(佛性說)의 전개를 위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역경승 진제삼장(眞諦三藏)은 ≪섭대승론 攝大乘論≫ 등의 유가학파 경전을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의 대표적인 논서인 ≪대승기신론≫을 번역하여 당나라의 화엄종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 경전들은 역경이 이루어진 것과 거의 같은 시기 또는 100∼200년의 간격을 두고 모두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으며, 우리 나라 고승들에 의해서 깊이 있게 연구되고 유포되었다. 이들 경전들은 우리 나라 불교의 여러 종파의 근본경전으로 채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불교사상의 골격이 되었던 것이다.
육조시대의 불교
육조시대(六朝時代)라 함은 강남(江南)의 건업(建業)에 도읍을 두었던 육왕조시대(六王朝時代)를 말한다. 육조는 강남 땅에서 번영한 귀족정치·귀족문화라는 공통성에 착안한 문화사적인 명칭이다.
육조불교의 특색은 육조문화의 일반적인 특색과 마찬가지로 귀족적·고답적·학술적이었으므로 북조(北朝)의 국가적·주술적·실천적인 불교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남조에는 족벌귀족이 광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제왕 이상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높은 고전적 교양을 몸에 지니고 현학(玄學)을 숭배하며 청담을 즐겼다.
불교도 이들에게는 방외은일적(方外隱逸的:세상 밖의 뛰어난 것)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유마경≫과 ≪반야경≫ 등이 애호되었다. 격의불교가 성행된 것도 이때였다.
여산의 혜원(慧遠)이 “사문(沙門)은 방외(方外)의 빈(賓)이므로 세속적 정치권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된 것도 그 자신이 동진의 귀족사회에 몸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조시대의 불교는 전반적으로 지배자들의 보호를 받아 정치에 참여하는 승려도 많았을 뿐 아니라 북조에서 있었던 폐불(廢佛: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 등이 사원·불당·불상·불경 등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며,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장원과 노비를 몰수한 불교탄압사건)도 없었고, 왕후·귀족에 의하여 웅대한 사원이 건립되어서 불교의 연구시대라고 칭할 만큼 경론의 연구와 강설이 성하였다.
제(齊)나라의 태자 문혜(文惠)와 동생 숙자량(肅子良)은 열렬한 불교신자로서 많은 학승을 가까이 하여 강석(講席)과 법회를 설치하고 불교서적의 편찬사업을 행하였다.
양(梁)나라의 무제(武帝)는 남조의 여러 제왕들 중에서도 높은 교양을 가지고 있어서 불교의 교리에도 정통하였다. 그는 스스로 ≪단주육문 斷酒肉文≫을 저술하고 대사원을 건립하였으며, 육지나 물에 있는 고혼을 제도하는 법회인 무차대회(無遮大會)를 10여 차례나 열었다.
역경사업도 육조시대에 가장 성행하였다. 앞에서 열거한 외에도 강량야사(畺良耶舍)·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등의 외국승과 법현(法顯) 등의 중국승이 활약하였다.
또한 양대(梁代)에는 승황(僧晃)·법운(法雲)·지장(智藏)의 3대법사가 출현하고, 또 불교사가로 유명한 승우(僧祐)는 ≪출삼장기집 出三藏記集≫과 ≪홍명집 弘明集≫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고승전 高僧傳≫을 지은 혜교(慧皎)도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수·당의 불교
수나라와 당나라는 중국 불교가 새로운 전개를 보이게 된 시대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불교에 가장 큰 폭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도 이 시대의 불교이다.
남북의 분열을 통일한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는 통일국가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불교를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정의 경론에 입각한 새로운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그 대표적인 특색이 종파불교(宗派佛敎)이다.
수·당 이전에도 비담종(毘曇宗)·섭론종(攝論宗)·성실종(成實宗)·지론종(地論宗)·열반종(涅槃宗) 등의 종(宗)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학파라고 불러야 할 것이고, 후대에 생겨난 종파와는 다른 것이었다. 학파로부터 종파로의 발전을 촉진한 계기가 된 것은 사원경제의 독립과 교판(敎判)의 확립이다.
수나라의 지의(智顗)가 대성한 천태종이 ≪법화경≫을 지상으로 하는 독자적인 교판을 확립하여 처음으로 종파를 만들었다. 당나라 때에는 법장(法藏)이 ≪화엄경≫을 중심으로 불교를 체계화하여 화엄교리를 완성하였다.
또한 도선(道宣)은 계율(戒律)을 연구하여 율종(律宗)을 창시하였고, 현장(玄奘)과 규기(窺基)는 인도의 새로운 유가유식설(瑜伽唯識說)을 기초로 하여 법상종(法相宗)을 열었다. 아울러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 등이 들여온 밀교의 융성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천태종과 화엄종이 수·당불교의 사상적 절정이라고 한다면 선종(禪宗)과 정토교(淨土敎)는 불교의 중국화와 민중화에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선종은 5조 홍인(弘忍)의 무렵에 이르러 도속(道俗)의 귀의자가 급증하게 되었고, 6조 혜능(慧能)은 그때까지 없었던 도시에 대한 포교를 중시하였다.
홍인으로부터 갈라지게 된 혜능의 계통은 남종선(南宗禪)이라 불리고, 신수(神秀)의 계통은 북종선(北宗禪)이라 불렸는데, 이 두 파는 처음 대등한 교세를 유지하였으나 얼마 뒤에 북종은 쇠퇴하고 말았다.
정통교는 담란(曇鸞) 이후 도작(道綽)·선도(善道)가 나와 구칭염불(口稱念佛)을 보급함으로써 무지한 민중들의 환영을 받아 많은 신자를 획득하였다.
845년의 폐불과 연속된 전란으로 말미암아 불교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으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한 선종과 민중의 마음속 깊이 파고든 정토교는 그 세력을 더하여갔다. 수·당의 불교는 중국불교 융성의 정점에 위치한다.
(1) 선종의 발달
선(禪)은 인도에서 기원된 것이나 중국에 전해져서 새로운 발전을 보게 되어 유력한 종파의 하나가 되었다. 선종의 조사(祖師)인 보리달마(菩提達磨)는 이입사행설(二入四行說)에 입각한 좌선을 권장하였다. 선종은 그 뒤 혜가→승찬→도신→홍인에게 차례로 전해졌고, 홍인의 시대에는 법회에 참가하는 이가 500명에 이르렀다.
당의 초기에는 신수의 북종과 혜능의 남종이 대립하여 분열되었다. 북종은 차츰 닦아 깨닫는 점오(漸悟)를, 남종은 단번에 깨닫는 돈오(頓悟)를 표방하였다.
혜능은 6조가 되어 그 문하에 회양(懷讓)·행사(行思)·신회(神會) 등이 있었고, 강서와 호남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백장(百丈)은 선원에 있어서의 규범이 되는 청규(淸規)를 만들었다.
특히 혜능 이후 5대에 걸쳐서 위앙(潙仰)·임제(臨濟)·조동(曹洞)·운문(雲門)·법안종(法眼宗)의 5가(家)가 성립됨으로써 송대(宋代) 이후 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 나라는 6조 혜능의 남종선을 이어받아 신라 말에 선문구산(禪門九山)이 성립되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5가 중 임제종의 선을 이어받아 현재의 조계종(曹溪宗)에까지 그 맥락은 이어지고 있다.
(2) 밀교의 발달
현교(顯敎)에 대응하여 불교의 비밀, 심오한 교리를 뜻하는 밀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된 것은 동진시대의 전반에 백시리밀다라(帛尸梨密多羅)와 담무란(曇無蘭)에 의하여 ≪대관정신주경 大觀頂神呪經≫·≪시기병경 時氣病經≫·≪청우주경 請雨呪經≫ 등의 많은 밀교경전이 번역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 경전은 병을 고치고 비를 오게 하는 주문이나 제천(諸天)의 위덕을 찬미하는 따위의 주문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을 잡밀(雜密)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술적인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순수한 밀교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진언다라니(眞言陀羅尼)나 그 밀법(密法)은 중국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이와 같은 기반 위에 당나라 때의 선무외·금강지·불공의 3대사(三大士)에 의하여 밀교의 교리와 의식궤범·만다라 등이 조직되고 체계화되었다.
이들이 전한 밀교는 ≪대일경≫이나 ≪금강정경≫ 등에 기초를 둔 인도의 정통밀교로, 잡밀에 대응하여 순밀(純密)이라고 부른다. 이 순밀 또한 선무외의 제자였던 불가사의(不可思議) 등에 의해 신라로 전래되었으나 종파로까지 발전되었음을 입증하는 사료는 찾아볼 수 없다.
(3) 유·불·도 3교의 담론
당나라 중기부터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대표자들은 궁중에서 잦은 토론회를 가졌었다. 황제의 탄생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3교의 대표적인 학자들을 궁중에 초대하여 토론을 벌이는 행사가 매년 개최되었다.
3교의 담론은 당나라 초기 고조(高祖)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고조는 624년에 박사(博士) 서광(徐廣)에게 ≪효경 孝經≫을, 사문 혜승(慧乘)에게는 ≪반야심경≫을, 도사 유진희(劉進喜)에게는 ≪노자≫를 각각 강의하게 하였다.
또 태종(太宗)은 639년에 공영달(孔穎達), 사문 혜정(慧淨), 도사 채황(蔡晃)의 3인에게 홍문전(弘文殿)에서 3교에 대한 담론을 하게 하였다.
그 뒤 대종·덕종·경종·문종·무왕·선종·의종·소종 등의 역대 황제들도 연례행사로 개최하였으나 차츰 형식화되면서 진지한 맛이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3교의 담론은 초기의 종교토론회 성격과는 달리 전혀 내용이 없는 궁중의례의 하나로 변질되고 말았다.
3교의 논쟁은 당나라 중기부터 격화되었으나 논쟁의 이면에는 서로 융합하려는 움직임도 있어서, 절에서는 노자의 상을 그려 붙이기도 하고 유자(儒者)나 도사로서 불교를 연구하여 출가하는 자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4) 교선일치(敎禪一致)
선종과 교종이 교세를 확장하여 가면서 말과 글을 통하여 가르침을 펴는 화엄종·천태종 등의 교종과, 말과 글에 의하지 않고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선종이 서로 일치한다는 주장을 낳게 되었다. 교선일치의 주장은 당나라 중기의 화엄종 제4대조인 징관(澄觀)의 사상으로부터 싹이 터서 제5대조 종밀(宗密)에 의하여 명료한 형태로 나타났다.
종밀은 처음 선을 공부하고 뒤에 징관의 가르침을 받아 화엄교학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엄과 선을 융합하여 일치시키고자 교선일치론을 주장하였다.
이 교선일치의 사상은 송대(宋代)에 이르러 차츰 뚜렷해져서 선종과 교종의 융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송나라 초기에 연수(延壽)가 주장한 교선일치를 비롯하여 천태선·화엄선·염불선 등이 두드러지게 유행하게 되었고, 교종을 배우는 자가 선문(禪文)을, 선에 몸을 담은 자가 교종의 제학(諸學)을 탐구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의 의천(義天)과 지눌(知訥)이 교선일치의 사상을 깊이 포용하여 교관병수(敎觀竝修)·정혜쌍수(定慧雙修) 등을 주창함으로써 한국불교의 한 정통으로 정착시켰다.
송나라의 불교
송나라의 불교는 염불선(念佛禪), 송학(宋學)과 선(禪)의 교류, 거사불교(居士佛敎)의 성립, 백련교(白蓮敎) 등으로 집약된다.
(1) 염불선
당나라 중기에 일어난 교선일치 운동은 송나라 때에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연수의 교선일치설이 확립되자 천태·화엄·정토종의 학도로서 선을 연구하거나 선가에서 교학을 공부하는 이도 출현하였다. 그리고 정토종은 특별한 하나의 종파로서보다는 이들 각 종파의 사람들이 염불신앙을 가지게 됨으로써 성행하게 되었다.
송대의 정토교도로서 유명한 이들 중에는 선종이나 천태종 출신자들이 많았고, 특히 천태종 계통의 정토교가 성행하였다. 선종에서는 염선일치(念禪一致)를 주창하려고 ≪종경록 宗鏡錄≫·≪만선동귀집 萬善同歸集≫을 지은 연수를 비롯하여 종이(宗頤)·종본(宗本)·법수(法秀)·의회(義懷) 등은 모두 염불선을 강조하였고 선정습합(禪淨習合)을 취했던 인물들이었다. 거사들로는 양걸(楊傑)·왕일휴(王一休) 등이 유명하다.
이와 같은 풍조는 선종을 더욱 성행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인물들이 일반 사회의 종교로서 민중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애호되고 보급되었던 정토교를 배워 매일의 일과로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게 됨에 따라 염불선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명대(明代) 와서도 역시 선정융합(禪淨融合)의 형태인 염불선이 성행하였으며, 청조(淸朝)의 옹정제는 스스로 원명거사(圓明居士)라 칭하고 염불선을 고취하였다. 민간에서는 명나라 이후 이와 같은 염불선을 중심으로 불교가 신봉되고 실천되었다.
(2) 선과 송학(宋學)
송나라 때에는 훈고학(訓詁學)을 탈피하고 성(性)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성리학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를 ‘송학’이라고 한다. 송학자들 중에는 학문과 실천의 방법으로서 참선을 익힌 이들이 많다.
주돈이(周敦頤)는 귀종사의 불인(佛印)과 동림사의 상총(常總)으로부터 불교의 학문을 배웠고, 장재(張載)도 상총에게 배웠으며, 정이(程頤)도 선을 배웠다.
특히 주자(朱子)는 어릴 때부터 종고(宗杲)의 ≪대혜어록 大慧語錄≫을 애독하고, 당나라의 선사인 위산(潙山)의 사상을 사랑하였다. 선이 당시의 이름 있는 유학자를 사로잡게 된 이유는, 선이 간단명료한 교리에 의거하여 적절한 수행방법으로 지심견성(指心見性)을 터득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에 차차 정비되어 간 승원(僧院)은 다른 종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고, 그 중에도 초범탈속(超凡脫俗)한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어 후배를 지도하였고, 기지에 차고 준열한 문답과 대담이 가득찬 선가(禪家)의 어록에는 청신하고 기발한 문자가 약동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선종의 제1서라고 일컬어지는 ≪벽암록 碧巖錄≫과 당나라 중기 이후에 처음으로 교계의 표면으로 나타난 ≪능엄경≫은 많은 사람에게 애독되었고, 거사(居士)로서 주석서를 남긴 이들도 있다.
송나라 이후 명·청나라 때에도 중국불교는 삼종일원(三宗一源)·민간불교 등의 독특한 성격을 띠면서 발달하였으나, 우리 나라는 조선시대의 배불정책으로 불교가 쇠퇴되어 명나라 이후의 중국불교는 우리 나라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인도의 불교가 원류로서 한국불교의 뿌리를 점한 것이라면 중국불교는 각 시대마다 한국불교가 새로운 옷을 입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고려 말까지 중국불교의 큰 특색은 우리 나라에 수용, 변형되어 새로운 물결을 조성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불교 [佛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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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B.C. 2세기 전한(前漢) 애제(哀帝)의 원수(元壽) 원년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이후 오늘날까지 중국 불교는 대체로 다음의 다섯 시기로 분류된다.
1) 전역(傳譯)시대 : 최초의 전래부터 동진(東晋) 도안(道安)에 이르는(B.C. 2세기~A.D. 400) 시기.
2) 연구시대 : 동진의 나습(羅什)에서 남북조 말에 이르는(401~580) 시기.
3) 독립시대 : 수의 초기에서 당(唐)나라 현종(玄宗)에 이르는(581~750) 시기.
4) 실천시대 : 당 현종에서 북송(北宋) 말에 이르는(751~1120) 시기.
5) 계승시대 : 남송에서 청조 말에 이르는(1121~1910) 시기로 구분지을 수 있다.
처음 불교가 전해진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1세기 중엽 한(漢)나라 때 서역(西域:티베트)지방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역지방은 옛날부터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요로에 있어 양쪽 문화의 접촉장소가 되어왔으므로 인도의 불교가 재빨리 서역에 전해지고 다시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서역지방에도 독특한 불교문화가 개화하였는데, 그 서역불교의 발자취는 둔황[敦煌]을 비롯한 여러 곳의 유적에서 엿볼 수 있다. 초전기(初傳期)에서 4세기까지를 중국불교의 제1기라 할 수 있으며, 이 시대에는 서역방면으로부터의 내입승(來入僧)의 활약이 눈에 띈다. 즉 안세고(安世高) ·지루가참(支婁迦懺) ·축법호(竺法護) ·불도징(佛圖澄) 등이며 그들은 대승 ·소승의 경전을 번역하여 불교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를 넓히는 데 노력하였다. 중국인 불도(佛徒)로 주사행(朱士行) ·도안(道安) ·혜원(慧遠) 등이 나왔고, 특히 도안 ·혜원 등은 학문적이고 이론적이었던 불교를 실천으로써 이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불교가 무조건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며 고래의 사상과의 유사점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일도 있었다. 불타가 황제(黃帝) ·노자(老子)와 나란히 제향되는 예가 그것이며, 4세기 무렵부터는 불교의 ‘공(空)’을 노자의 ‘무(無)’로 해석하려는 격의불교(格義佛敎)도 생겨났다. 401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장안(長安)에 들어와 대승경전의 번역을 시작한 때부터 중국불교는 제2기에 들어선다. 구마라습은 여러 경전의 뛰어난 한역(漢譯)을 행하여, 그 한문경전에 의한 불교 본래의 교리연구가 진행되었고, 중국인의 불교에 대한 이해도 넓어져, 이후 중국불교의 사상적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 불교 전래
1) 기원후 67년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시기라 한다.
2) 중국 최초의 절은 낙양 옹관 서쪽 백마사라 한다.
3) 유교, 도교 등과 대립, 투쟁으로 많이 변용 되었다.
4) 노장사상, 유교사상을 접목한 불교이다.
5) 중국 특유의 불교체계로 전환케 하였다.
6) 봉건왕조는 불교를 유교나 도교의 성격으로 변용시켜야 했다.
2, 격의불교 [格義佛敎] (기원후 220-420)
1) 중국불교가 정착되지 못한 시기를 격의불교라 한다.
2) 공(空)을 무(無)로 해석하는 등의 난항을 겪는다.
3) 고승 도안(道安)은 중국 민속 신앙과, 해석에 차이에 폐단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5) 구마라습의 불교 경전을 본래의 뜻에 맞게 번역한 후에 극복 되었다.
3, 불교의 갈등과 정착
1)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머리 깎고 수행하는 사문은,
유교측의 볼 때 가장 큰 불효를 저지르는 비판의 대상,
2) 중국의 민간신앙과 불교가 결합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근본사상을 벗어난 경전을 만들다. 산왕경, 고왕경,
팔양신주경 등이 그것이다.
3) 불교의 무한한 시간에 걸친 윤회사상, 우주론, 심오한
불교 사상이 중국 사람들에게 매료 되었다.
4) 유교사상을 공부하듯이 불교경전을 읽고 분석하여
학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4, 중국의 역경사업
1, 안세고[安世高] 후한[後漢]
1) 인도 서북부 이란의 접경지역, 안식국(安息國) 출신, 왕위 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2) 소승불교의 전적(典籍)인 아비달마와 선경(禪經)에 정통 하였다.
3) 안세고는 148년에 낙양(洛陽)에 들어와 안반수의경(安般 守義經)을 비롯하여 95부 115권의 불교 경전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그의 불경 번역은 중국 역경사에서 최초기 에 해당한다.
4) 후한(後漢: 25~220) 시대에 번역된 불교 경전들은 매끄 럽지 못하고 난해하다, 안세고가 번역한 경전들도 그러하다.
2, 축법호 [竺法護] (231~308)
1) 중국 서진(西晉)시대 둔황[燉煌]의 역경승으로 8세에 출가
2) 36개국의 말과 글을 두루 통달 하였다고 한다.
3) 인도에서 범어로 된 불전을 가지고 장안[長安], 낙양[洛 陽]에 왔다.
4) 반야경, 정법화경, 무량수경 본생담 화엄부 등 165부를 번 역하였다.
5) 둔황보살[敦煌菩薩], 월지보살(月氏菩薩), 본재보살(本齋普 薩)이라고 칭했다.
6) 중국에 관음(觀音)신앙 영험설화를 보급 하였다.
3, 불도징[佛圖澄] (232년~348년)
1) 인도 구자국 출신으로 9세에 출가 하였다고 한다.
2) 오장국과 계빈국에서 수학하고, 경전 암송을 잘하며, 경전 에 뜻을 잘 이해하였다.
3) 서진시대 낙양에 왔으며 신통한 법으로 사람을 놀라게 함.
4) 후조시대 석륵에 병사가 몰려와 양민과 승려를 살해할 때 진중에 들어가 신통력으로 교화 하였다.
5) 왕의 신임을 받아 궁궐을 드나들며 고문으로 군사와 정치 에 참여 하였다.
6) 그가 창건한 사찰은 893개 사원에 이른다 하고, 가르침을 받는 승려가 1만명에 이른다 한다.
7) 제자로는 도안, 축법아, 태산승랑, 등이 뒤에 중국 불교를 이끌어 갔다.
8) 348년 12월 117세 나이로 입적 하였다고 한다.
4,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
1) 인도 귀족출신이며 구자국에서 출생 7세에 출가하였다.
중국은 5호16국 시대이다.
2) 인도 북쪽 계빈에서 반두달다(槃頭達多)에게서 소승교를 배웠다.
3) 소륵국에서 수리야소마[須梨耶蘇摩]로부터 용수[龍樹]의 대승교[大乘敎]를 배웠다.
4) 구자국으로 돌아와 비마라차[卑滅叉]에게서 율[律]을 배웠다.
5) 401년 전란을 피해 구마라습은 양주에서 머물다 장안으로 왔다.
6) 중론, 대지도론, 법화경, 반야경 등 경률 74부 380권을 펴냈다.
7) 그의 제자 3000명 가운데 도생[道生], 승조[僧肇], 도 융 [道融], 승예[僧叡]를 가리켜 습문[什門]의 4철[四哲]이라 한다.
8) 오늘날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그를 삼론종[三論宗]의 조사[祖師]라 한다.
9) 413년 장안의 대사[大寺]에서 69세로 죽었다.
5, 진제삼장[眞諦] (499~569년)
1) 서인도 굽다 제국 밑에 있는 우선니국 바라문 출신이다.
2) 부남국에 왔다가, 양무제의 초청으로 중국에 경론을 가지 고 왔다.
3) 경, 률, 논에 달통하여 진제삼장이라 한다.
4) 대승불교 사상을 체계화하고 논리화 하였다.
5) 섭대승론, 대승기신론, 금광명경, 불성론, 유식론 등 49부 140권을 번역 하였다.
6) 중국불교 13종 가운데 섭론종[攝論宗]을 개창 하였다.
7) 후세에 구마라습, 현장, 불공과 함께 4대번역가로 손꼽는다.
6, 불공[不空] (705-774)
1) 북인도에서 태어나 720년 스승 금강지를 따라 남중국해를 거쳐 낙양에 왔다고 전한다.
2) 본래 이름은 아모가바즈라 이고 번역하여 불공금강이라 하 고 밀교의 6대조라 한다.
3) 당나라시대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에 재능을 살려 스승에 역경 사업을 도왔으며 밀교 경전의 역경자이다.
4) 스승이 죽은 뒤 인도에 가서 산스크리트어 경전과 밀교경 전을 가지고 장안에 와서 역경사업에 전념하였다.
5) 금강정경을 비롯하여 110부 143권 번역하여 4대번역가 의 한 사람이다.
7, 현장[玄奘] (602-664)
1) 중국 하남성에 출생 10세에 형을따라 낙양 정토사에서 불 경을 공부하다가 13세에 현장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2) 삼장법사라 칭하는 것은 경장, 율장, 논장에 능하여 부르 는 말이다.
3) 629년에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와 75부 1335권 많은 번역을 하였다.
4) 불사리 150과 불상 8구를 모셔와 흥복사에 모셨다.
5) 현장 이전에 번역한 경전은 구역[舊譯]이라 하고, 현장 이 후에 번역한 경전은 신역[新譯]이라 한다.
6)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총21권17년간 천축국에 구법의 행적을 정리한 것인데 대당서역기는 현장이 직간접으로 체 험한 138국의 풍토, 전설, 관습 등을 정리한 책이다.
7) 현장은 5천축 80개국 중 75개국의 역사를 남겨 놓으므로 지금에 인도 역사를 파악하는데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