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 한국불교 -
국가의 관리
조선 중엽 이후 굳게 닫혔던 성문이 근대에 들어오면서 열려지게 됨에 따라 자유로운 불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국가에서도 뒤늦게나마 자각을 하여 지금까지의 불교배척의 억압정책을 지양하고 국가적인 관리를 꾀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아울러 불교계에서도 전국 사원의 통일적인 통제를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1899년에는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워 한국불교의 총종무소(總宗務所)인 국내 수사찰(首寺刹)로 삼고 13도에 각각 하나의 수사(首寺)를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하였다.
그 뒤 1902년에는 정부에서 사원의 국가관리를 위하여 궁내부(宮內部) 소속으로 관리서(管理署)를 설치하였다. 관리서는 사사관리세칙(寺社管理細則)을 제정하고, 대법산(大法山)과 중법산제(中法山制)를 실시하여 전국 사찰 및 승려에 관한 사무 일체를 맡아보았다.
대법산은 국내 수사인 원흥사로 정하고, 중법산은 도내 수사 16개 절을 지정하였다. 오랫동안 관심 밖에서 방치되었던 전국의 사찰 및 승려는 이를 계기로 국가행정의 범위 안에서 보호를 받게 되었다. 관리서는 궁내부에 소속원 정부의 한 관서였기 때문에 국가공무원인 관리가 관리주사(管理主事) 등의 사무직에 임명되어 제반 서무를 맡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의 혼란과 공무원의 부패로 인하여 이 관리서가 제도적·이념적으로는 아주 훌륭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렇다 할 뚜렷한 발전을 도모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이로 인하여 승려의 위치나 일반적 대우가 나아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관리서와 대법산의 제도도 오래가지 못하고 1904년 1월에 폐지됨에 따라, 그 소관 사무는 내부(內部) 관방(官房)에 옮겨졌다가 2월에는 내부 지방국(地方局)의 주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뒤 1906년에 이보담(李寶潭)과 홍월초(洪月初) 등이 원흥사에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를 설립하였다.
이 불교연구회는 일본 정토종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것이었으므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기관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여기에서 명진학교(明進學校)라는 새로운 교육기관을 창설하였다는 것은 길이 남을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명진학교는 현대적인 불교교육을 위한 최초의 교육기관으로 불교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원흥사를 교사로 하여 1906년에 세웠던 것으로서 오늘날 동국대학교의 전신이 된다.
1908년 3월에는 전국 승려 대표자 52명이 원흥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종단의 이름을 원종(圓宗)으로 결정한 뒤 원흥사에다 종무원(宗務院)을 설치하였다. 1910년 서울 전동에 각황사(覺皇寺)를 세우고 조선불교중앙회무소(朝鮮佛敎中央會務所)로 삼을 때까지 원흥사는 근대 한국불교의 발상지요, 새 불교의 요람지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원종의 종정(宗正) 이회광(李晦光)은 일본으로 가서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연합하기로 합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분개한 국내의 승려들은 승려대회를 열었고, 1911년 정월에는 영남·호남의 승려들이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웠다.
임제종은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두었다가 그 뒤에는 동래 범어사(梵魚寺)로 옮겨, 서울 원종과 맞서서 포교활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미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조선총독부가 생긴 뒤의 일이었으므로, 불교종단도 총독부의 지배하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총독부는 사찰령(寺刹令)을 제정하여 이 땅의 모든 사찰과 승려문제를 규제하였으므로, 원종과 임제종의 대립도 저절로 없어지고 우리 나라의 불교는 국가의 운명과 함께 조선총독의 관리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교 단
1910년 8월에 나라를 잃은 이 땅의 불교는 1911년 6월 새로운 사찰령이 제정, 반포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지배 아래에서 새로운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즉 총독부 사찰령에 의하여 한반도 내의 교단은 30곳의 본산제(本山制)로 형성되었으며,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 하여 지금까지의 종론(宗論)을 통일하고 중앙에 30본산회의소(本山會議所)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교단은 조선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산으로 나뉘어 각각 30군데의 교구(敎區)로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비록 30본산회의소가 있었으나 각 본사간의 유기적인 연관관계가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30본산 주지들이 포교 및 교육사업의 일원화를 꾀하기 위하여 연합규제를 마련하고 30본산 연합사무소를 서울의 각황사(覺皇寺)에 두었다.
그러나 이 연합사무소는 이름 그대로 30본산의 연합사무만을 집행하였을 뿐, 전국사찰을 통할하고 전국 승려를 통제하는 권한은 없었다.
그리하여 실질적인 중앙통제기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필요성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 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총무원(朝鮮佛敎禪敎兩宗中央總務院)이다. 중앙총무원이 1922년 1월 각황사에 설치된 뒤 그 해 5월에는 같은 각황사에 불교선교양종중앙교무원(佛敎禪敎兩宗中央敎務院)이 설치되었다. 몇 년 뒤에는 양원(兩院)이 하나로 뭉쳐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朝鮮佛敎中央敎務院)이 되었다.
1929년 1월 각황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종헌(宗憲)과 교무원의 원칙(院則) 및 교정회법(敎正會法)·종회법(宗會法) 등을 제정하였으며, 7명의 교정(敎正)을 선출하여 종단 최고의 원로기관으로 하였다.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명실공히 중앙통제기구로서의 체제를 갖춘 것이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서 근본적인 어떤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시 총본산운동(總本山運動)을 전개시키기에 이르렀다.
1941년 봄에 태고사(太古寺:지금의 曹溪寺)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고 불리던 종단의 이름을 조계종(曹溪宗)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교단을 통제하기 위하여 31본산 위에 전국 사찰을 통일적으로 총괄하는 총본산을 두었는데, 그 총본산을 태고사로 삼았다.
1941년 4월 23일부터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사법(太古寺寺法)의 인가를 얻어 조계종으로 발족한 이 종단에서는 제1대종정(宗正)을 중원(重遠)으로 추대하고 그 해 6월 6일부터 총본사인 태고사 종무원에서 종무를 시작하였다. 이 조선불교조계종도 1945년 8월 15일의 광복과 더불어 한국불교조계종(韓國佛敎曹溪宗)으로 정비되어 새로운 출발을 보게 되었다.
광복과 함께 1945년 10월에는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일제의 사찰령과 당시까지의 사법(寺法)을 폐지하고 새로운 불교교헌(佛敎敎憲)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조계종 초대 교정에 박한영(朴漢永)을 추대하였다. 이로써 한국불교는 식민지정책의 굴레를 벗어나서 불교문화를 무한히 꽃 피울 내일을 약속하게 된 것이다.
교육 및 문화사업
불교의 현대적 교육은 1906년 명진학교가 설립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 뒤 각 지방에 불교학교를 설립하게 하였는데 이는 젊은 불교인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 건립이라는 명분으로 각 지방의 사찰재산들이 징발당하였으므로 이를 방지하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명진학교의 교장은 당시 불교연구회 회장이었던 이보택(李寶澤)이 맡았으며, 1907년에는 이회광이 선임되었다.
1908년 불교연구원에 이어서 원종종무원이 원흥사에 들어선 다음 명진학교는 불교사범학교(佛敎師範學校)로 고쳐졌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능인보통학교(能仁普通學校)·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 등을 세웠으나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고, 1916년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을 설립하였으나 3·1운동 때 학림의 학생들이 많이 활약하였고 또 독립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에 총독부의 제지를 받다가 1922년 30본산연합 제규(制規)가 폐지된 뒤 폐교되고 말았다.
1921년에는 따로 동광학교(東光學校)가 설립되었고, 1922년에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인수하여 경영하였는데, 1925년에 이 두 학교를 병합하여 불교전수학교로 만들었다.
이 불교전수학교는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되었고, 그 뒤 1940년에는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로 학교명을 고쳤으며, 1946년 9월에는 동국대학(東國大學)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53년에는 동국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이 밖에도 서울과 각 지방에는 종립학교(宗立學校)가 설립되어 초·중·고등학생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교육기관 이외에 이 시대의 문화사업으로는 불교지(佛敎誌)의 간행을 들 수 있다. 신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불교계 최초의 잡지로 발간한 것은 1910년 12월에 창간된 ≪원종 圓宗≫을 들 수 있으나, 이는 원종 종무원의 기관지이며 겨우 2호로서 종간되었다.
불교문화의 종합지이며 본격적인 불교잡지는 발행인 권상로(權相老)가 1913년 2월에 발간한 ≪조선불교월보 朝鮮佛敎月報≫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잡지는 1913년 8월에 19호로 종간되었다.
그 해 11월에는 ≪해동불교 海東佛敎≫가 박한영(朴漢永)에 의해 발간되었는데, 1914년 6월에 8호로 종간되었다. 1915년 3월에는 ≪불교진흥회월보 佛敎振興會月報≫가 이능화(李能和)에 의해 발간되었다가 같은 해 12월에 9호를 내고 종간되었고, 1916년 4월에는 다시 이능화가 ≪조선불교계 朝鮮佛敎界≫를 발간하였으나 3호를 내고 종간되었으며, 1917년 3월에 다시 이능화가 ≪조선불교총보 朝鮮佛敎總報≫를 발행하여 1920년 5월까지 21호를 발간하였다.
1924년 7월에는 권상로가 ≪불교 佛敎≫를 발행하여 10년을 속간하다가 1933년 6월에 107호를 내고 종간되었고, 또 1937년 3월에 ≪불교≫지가 다시 속간되어 이를 ≪신불교 新佛敎≫라 하였는데 광복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밖에도 1914년에 동경 유학생들이 발간한 ≪금강저 金剛杵≫와 1920년에 통도사에서 발간한 ≪취산보림 鷲山寶林≫, 또 같은 해에 조선불교청년회 통도사지회가 발행한 ≪조음 潮音≫, 1924년 7월에 조선불교회가 발행한 ≪불일 佛日≫, 같은 해에 북경 불교유학생회에서 발행한 ≪황야 荒野≫, 1935년에 발간된 ≪불교시보 佛敎時報≫, 불교전수학교 교우회에서 발행하였던 ≪일광지 日光誌≫ 등이 있었다.
- 현대 한국불교 -
현대 우리 나라의 불교사에 있어 가장 큰 과제는 일제시대에 문화적인 탄압의 일환책으로 일본식 불교를 신봉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대처승(帶妻僧)을 장려함으로써 흩어졌던 승단을 다시 정화하는 데 있었다. 일본인들의 승려 대처화는 무뢰배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크게 호응을 얻었고, 식민지정책의 비호 아래 무뢰한 파계괴법승(破戒壞法僧)들의 사원 장악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소수의 비구승들은 최후의 보위책으로서 1926년 12월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현재의 禪學院)을 설립하였다. 그 뒤 이곳을 중심으로 모든 정화운동이 미약하나마 전개되기에 이르렀고 1941년 3월 13일에는 이 선학원에 당대의 고승들이 모두 참석하여 비구승대회(比丘僧大會)를 열었다.
이때 석가모니의 교지(敎旨)를 천명하고 정법(正法)의 수호를 위해서는 승풍(僧風)을 정화하고 대처승의 비리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비구승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오히려 그 대회가 불법임을 주장하며, 선학원을 중심으로 하는 비구승의 세력을 거세하는 작업에 착수하기까지 하였다.
1945년에 광복을 맞았으나 불교종단의 암운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광복 초의 혼란을 틈타 종권다툼은 더욱더 극을 향해서 치닫고 있었다. 1950년 이래, 각지의 뜻 있는 승려들은 다시 절을 찾아 정법수호(正法守護)의 기치를 내걸게 되었다.
전국의 각 사찰마다 비구와 대처승의 싸움은 그칠 날이 없었고, 절을 뺏고 빼앗기는 싸움은 유혈사태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조실(祖室)을 추방하거나 선원(禪院)을 이동하기도 하였으며, 숱한 문화재들이 파괴되고 도굴된 것도 많았다.
6·25전쟁이 발발하였을 때도 이와 같은 사정은 변하지 않았다. 신심 있는 승려가 지키지 않는 절은 이미 수도장이라기보다는 관광지였고 놀이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경위는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 있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에게 상세히 보고되기에 이르렀고, 이승만은 “처자 있는 사람들은 절에서 물러가고, 한국 고유의 승풍을 살리기 위해 독신승이 사찰을 지키게 하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 담화는 정화추진의 일대 전기가 되었다.
1954년 6월 24일 서울 안국동의 선학원에서는 원로 비구(元老比丘)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교단정화대책위원회(敎團淨化對策委員會)를 구성하였고, 8월 24일에는 제1차로 전국비구승 대표자대회가 소집되어 정화운동의 기본방침을 결정하였다.
교계 신도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언론도 적극적으로 위원회의 결의사항을 지지하였고, 사회정화·민족종교부흥이라는 관점에서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성원을 받았다.
1954년 9월 28일에는 제2차 전국비구승대회가 열렸고, 이 대회에서 새로운 종헌(宗憲)이 채택되었으며, 종정에 송만암(宋曼庵), 부종정에 하동산(河東山), 도총섭(都摠攝)에 이청담(李靑潭) 등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처승들은 새로운 물결의 흐름을 완강하게 거부하였으며,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도저히 쌍방의 합의점을 찾을 길이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더구나 종정으로 추대된 송만암마저 정화방법에 이의를 제기하게 되자, 전국비구승대회는 하동산을 새로운 종정으로 추대하고 대처승들에 의해 강점되었던 태고사(太古寺)를 다시 되찾기 위해 법적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1954년 11월 5일에 그곳을 정식으로 접수하여 조계사라고 개칭하였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쌍방은 전권대표 5명씩을 선발할 것을 합의하여 불교정화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으나, 그 회합에서도 양측의 합의점은 찾지 못하였다.
1955년 8월 11일에는 제5차 전국승려대회가 소집되었는데, 많은 논란을 겪은 끝에 새로운 종단의 출범에 관한 여러 가지 행정적인 문제들이 제기되고 검토되었다.
그때 조계사에는 1,003명의 비구가 참석하였고, 새로운 종단의 종정으로 석우(石友)가 추대되었다. 1958년 8월 13일 다시 하동산이 종정으로 추대되었고, 효봉(曉峰)·청담 등 여러 고승들과 함께 대처승을 설득하고 회유하여 극렬한 반대만을 일삼던 대처승들은 신종단(新宗團)의 출범에 협조하기에 이르렀다.
1962년 4월 12일 통일종단이 이루어지기까지 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당국의 협력과 신심 있는 수도자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오랜 불교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불교재산관리법>에 의하여 등록된 18개 종단이 있다. 한국 최대의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을 비롯하여 통합종단의 구성에 끝내 불응하여 별립(別立)한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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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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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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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진각종(大韓佛敎眞覺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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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진언종(大韓佛敎眞言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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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불입종(大韓佛敎佛入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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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법화종(大韓佛敎法華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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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법화종(韓國佛敎法華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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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일승종(大韓佛敎一乘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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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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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원효종(大韓佛敎元曉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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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화엄종(大韓佛敎華嚴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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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총화종(大韓佛敎總和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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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법상종(大韓佛敎法相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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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불교(天華佛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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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미륵종(大韓佛敎彌勒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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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정토종(大韓佛敎淨土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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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용화종(大韓佛敎龍華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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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보문종(大韓佛敎普門宗)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불교 [佛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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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불교의 전개
1910년에 각황사(覺皇寺)를 창건, 중앙회 사무실 겸 중앙포교소로 삼았다. 이회광이 그해 가을 일본 조동종과 임의로 연합조약에 합의하자, 국내 교계에서는 크게 반발, 개종역조(改宗易祖)의 매교행위라고 규탄하였다.
박한영 · 진진홍 · 한용운 등이 궐기하여 1911년 1월 영남과 호남의 승려를 모아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립도 1911년 6월 조선총독부가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자, 불교도 국운의 쇠퇴와 함께 식민지 통치 아래 들고 말았다. 이때 전국 사찰을 30본산으로 나누어 유기적인 관계를 단절해 놓았다. 이 무렵 불교청년회 및 불교유신회가 생겨 사찰령의 폐지와 정교(政敎) 분리를 주장하는 운동을 펼쳤다.
임제종
임제종 임시종무소를 송광사에 두고, 관장으로 선암사(仙巖寺) 김경운(金擎雲)을 선정하였다. 그러나 연로하여 한용운이 대리로 종무(宗務)를 맡게 되었으니 광주 등지에 포교당을 설치하고 원종과 대치하여 조선 불교의 정통성을 견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1911년 6월 조선총독부는 사찰령 7조를 발포하고, 7월에 사찰령 시행규칙 8조를 발포하여 모든 사원과 승려의 문제를 규제하였다. 이리하여 원종과 임제종은 모두 저절로 없어지게 되었다.
사찰령과 교단의 체제
1911년 6월 3일 사찰령(寺刹令)이 제정 · 발포되고, 동년 7월 8일에 사찰령시행규칙이 발포(發布)됨으로써 교단은 조선불교 30본산(本山)(1924년에 화엄사가 승격되어 31본산으로 됨)으로 형성되어 30개 교구역(敎區域)으로 나뉘었다. 이 사찰령에 의하여 동년 11월부터 30본산의 제1대 주지(住持)를 차례로 인가하였으며 이듬해(1912)부터는 사찰령에 의한 체제가 갖추어져 갔다.
또한 조선 불교를 선교 양종(敎禪兩宗)이라 하여 지금까지의 종론(宗論)을 통일하고 5월에 각황사(覺皇寺)를 중앙포교당으로 하여 30본산 회의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30본사(本寺)는 각각 사법(寺法)을 제정하여 총독의 인가를 얻고 각 사찰에 시행함으로써 사찰령의 취지를 실현하게 되었다. 사법(寺法)은 각 사찰에서 각각 제정하였으며 모두 총칙(總則) · 사격(寺格) · 주지(住持) · 직사(職司) · 회계(會計) · 재산(財産) · 법식(法式) · 승규(僧規) · 포교(布敎) · 포상(褒賞) · 징계(懲戒) · 섭중(攝衆) · 잡칙(雜則)의 13장(章)으로 하였고 그 내용도 거의 같았다.
30본산연합회
1915년 30본산에서는 포교 및 교육의 일원화를 위해 본사 주지들이 회의를 하여 30본산연합제규(聯合制規)를 제정하고, 각황사(覺皇寺)에 30본산연합사무소를 두었다. 위원장은 30본산의 주지 가운데서 선정하여 연합사무를 맡게 하였다. 이것은 30본산이 교구로 성립되고 총독의 지배를 받게 되어 유기적인 관계가 결여됨으로 인해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전국 사찰을 총괄하고 전 승려를 통제하지는 못하였다.[57]
총무원과 종무원
조선 불교계에 대한 일제의 간섭과 통제가 점점 심해지자, 신진 소장 승려들이 주동하여 신성한 종교가 행정관청의 지시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전국승려대회를 열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의하여 1921년 각황사에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총무원(총무원)을 설치하고 전국 사찰을 총괄하는 기구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30본사 주지 중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생겨, 이듬해(1922)에 별도의 기구인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종무원(종무원)이 역시 각황사에 설치되었다. 이리하여 같은 건물에 두 개의 간판을 걸고 총무원(總務院)과 종무원(宗務院)이 서로 정통임을 주장하였다.
1925년 마침내 총무원과 종무원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고 양원(兩院)은 하나로 뭉쳐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교무원)으로 되었으며, 교단은 통일적인 중앙종무기구를 갖게 되었다.
조계종의 성립
일제 치하의 한국 불교 교단은 그 종명(宗名)을 "조선불교 선교양종"이라 하였다. 그러나 보다 선명한 종명이 필요하였고 유기적인 중앙통제적 체제가 요구되었다. 이리하여 태고사(太古寺)를 세워 총본산을 삼고 종명을 "조계종"으로 결정하여 1941년 4월 23일부로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사법(寺法) 전16장 130조의 인가를 얻었다. 제1대 종정에 한암 중원(漢岩重遠)을 추대하고 종회법 · 승규법을 차례로 제정 · 발포하였다.
불교지의 간행
신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한국의 불교계가 최초로 잡지를 발간한 것으로는 1910년 12월의 《원종(圓宗)》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원종》지는 원종 종무원의 기관지(機關誌)이며 겨우 2호로서 종간(終刊)되었다.[59]
불교문화의 종합지이며 문화기구로서의 본격적인 불교잡지는 1912년 2월에 발간된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부터라고 할 것이다. 《조선불교월보》(편집인 및 발행자: 권상로(權相老))이며 1913년 8월에 19호로 종간되었다. 동년 11월에 《해동불보(海東佛報)》(편집인 및 발행자: 박한영(朴漢永))가 발간되었다가 1914년 6월에 8호로 종간되었다. 1915년 3월에는 《불교진흥회월보(佛敎振興會月報)》(편집인 및 발행자: 이능화(李能和))가 발간되었다가 동년 12월에 9호를 내고 종간되었다.
1916년 4월에 《조선불교계(朝鮮佛敎界)》(편집인 및 발행자: 이능화(李能和))가 발간되었으나 겨우 3호를 내고 동년 6월에 종간되었으며, 1917년 3월《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叢報)》(편집인 및 발행자: 이능화(李能和))가 발행되어 1920년 5월에 21호를 내고 종간되었다.
1924년 7월에는 《불교(佛敎)》(편집인 및 발행자: 권상로(權相老))가 발행되어 10년을 속간하다가 1933년 6월에 107호를 내고 정간되었으며, 또 1937년 3월에 《불교》지가 다시 속간되어 이를 《불교신(佛敎新)》이라 하였는데 해방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밖에도 1914년에 동경 유학생들이 발간한 《금강저(金剛杵)》와 1920년에 통도사(通度寺)에서 발간한 《취산보림(鷲山寶林)》, 또 동년에 조선불교청년회 통도사지회(支會)의 《조음(潮音)》, 1924년 7월에 조선불교회 발행인 《불일(佛日)》, 동년에 북경 불교유학생회에서 발행한 《황야(荒野)》, 1935년 발간된 《불교시보(佛敎時報)》, 불교전수학교 교우회에서 발행했던 《일광지(一光誌)》 등이 있었다.[59]
현대 (1945~현재)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 불교의 고유성을 되찾는 운동이 전개되어 1954년에서 1962년까지 승단정화(僧團淨化)의 기치를 내세워 1962년 4월 12일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이 발족되고 25교구(敎區) 본산제도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대처승(帶妻僧) 측은 끝내 불응하여 대한불교 태고종(太古宗)을 별립(別立)해 나갔고, 조계종단은 교세를 단합하여 한국불교가 직면한 3대불사(도제양성 · 포교사업 · 역경간행)에 박차를 가하였다.
조계종 이외에도 18종의 신흥불교가 우후죽순격으로 파생되었는데 이를 간결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법화신앙계(法華信仰系): 대한불교법화종 · 한국불교법화종 · 천태종 · 불입종 · 일승종(一乘宗)
- 밀교계(密敎系): 진각종(眞覺宗) · 진언종(眞言宗)
- 정토신앙계(淨土信仰系): 대한불교용화종 · 정토종 · 법상종 · 미륵종 · 천화불교
- 원효사상계(元曉思想系): 원효종 · 화엄종 · 총화회
이외에도 등록되지 않은 단체로 영산법화사관음종 · 구세불교가 있다. 비구니교단(比丘尼敎團)으로는 보문종(寶門宗)이 1972년에 등록을 필하였다. 불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지만 불교를 내세우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신흥불교인 원불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