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GJS-불교역사(3)

인도불교

圓鏡 2014. 12. 14. 22:12

- 불 교 -

 

부처의 가르침을 법()이라고 하므로 불교를 불법()이라고도 하고,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뜻에서 불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의 내용은 교조인 석가모니가 35세에 보리수 아래에서 달마(, dharma:진리)를 깨침으로써 불타(, Buddha:깨친 사람)가 된 뒤, 80세에 입적할 때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말한 교설이다.

 

그러나 부처가 탄생한 때인 기원전 5세기부터 현재까지 2,500년 동안 불교는 원시불교·부파불교()·소승() 및 대승불교 등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하게 발전하여 왔고, 경전도 여러 가지가 새롭게 편찬되어 왔다. 따라서 교리나 의식도 여러 지방의 발전과정에 따라서 판이하게 달라졌으므로 한 마디로 ‘불교는 이것’이라고 묶어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의 특이한 면이다.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는 브라만(Brahman)의 정통교리사상이 흔들리던 기원전 5세기에 크샤트리아(Kshatriya:무사·왕족의 계급)계층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시기는 브라만 전통사상에 대한 회의 속에서 새로운 사상을 표출하고자 노력했던 비브라만적인 신흥사상가들이 많이 출현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브라만 전통교리를 신봉하는 승려들과 구분하여 이들 신흥사상가들은 사문()이라고 불렀으며, 불교도 이 같은 비브라만적 신흥사상에 속한다. 그러나 불교는 전통 브라만사상의 형이상학적·본질론적 경향도, 사문의 회의적·부정적인 경향을 나타낸 신흥사상도 지양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부처가 형이상학적·본질론적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보류하였다는 기록이 초기경전에 보인다. 즉, 이 세상은 끝이 있는가 없는가, 시간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내세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등에는 답변을 보류하였다고 한다.

 

부처는 어떤 전제나 선입관을 근거로 하는 추론을 피하고, 모든 것을 현실의 있는 그대로도 보고 아는 입장을 지향하였다.

아트만(atman)이나 브라만()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보다는 ‘인간이 지금 이 자리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실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므로 부처가 깨친 진리는 형이상학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존재하는 구체적 양식, 즉 연기()로 설명된다. 이 세계는 신이나 브라만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존관계 속에서 인연에 따라 생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생활의 실제문제와 부딪쳤을 때 그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고 곧 불교이다.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자연히 인생문제의 해결이라는 실제적 목적이 앞서기 때문에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은 배제되었던 것이다. 또 부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조건과 개인적 차이에 따라서 그때 그때 가르침의 내용을 달리하는 응병시약적(:병에 따라 각각 약을 지어 줌)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길보다는 다양한 길을 택하였다. 불교의 교리가 너무 다양하게 전개되어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반면, 사람마다 지닌 사회적 조건을 충분히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불교의 관용성을 찾아볼 수 있다.

 

 

- 인도불교 -

 

불교가 일어날 당시 인도의 종교계는 다른 고대민족과 마찬가지로 애니미즘적 경향을 띤 원시신앙이 지배하고 있었고, ≪베다≫와 ≪우파니샤드≫에 근거를 둔 브라마니즘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개인 속에 내재하는 원리로는 아트만을 상정하고, 우주의 궁극적 근원으로는 브라만을 설정하여 이 두 원리는 동일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또 인간의 행위는 전생의 업에 의해 지배된다고 하였고, 현재의 행위는 미래의 고락()을 결정한다는 윤회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 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을 당시 사상가·종교가들은 최고의 이상으로 주장하였다.

업()·윤회·해탈의 사상은 후대 인도사상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며, 불교 역시 이러한 인도의 전통적 사상을 근저로 하고 새로운 종교사상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석가도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이러한 종교적 풍토 속에서 브라마니즘의 수행방법을 따랐다. 석가가 29세에 부인인 야쇼다라(Yasodhara, )와 아들 라후라(Rahula, )를 버리고 출가하여 택한 수행방법은 당시에 크게 유행하고 있던 선정()과 고행()이었다.

처음 출가한 석가는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우다카 라마푸타(Uddaka Ramaputta)에게서 가르침을 받다가 만족하지 못하여 5명의 수행자와 함께 고행의 길을 떠났다.

6년의 고행 끝에 고행이 최상의 방법이 아님을 알고 그 동안 행했던 모든 수행법과 이론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부다가야(Buddhagaya)의 보리수 아래에서 다시 7일 동안 명상한 끝에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가 깨달은 진리를 법()이라 하며, 그는 이 법을 펴기 위해 베나레스(Benares)의 녹야원(鹿)으로 가서 그곳에 있던 다섯 수행자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고[],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 이로써 불교는 교조·교리·교단을 갖춘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이때부터 부파불교 이전까지를 원시불교시대라 부른다.

원시불교의 중심교리는 중도()·십이연기()·사제()·팔정도()이다. 출가 수행 당시의 극단적 고행도 태자시절에 누렸던 쾌락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깨닫는 길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안 석가는 두 극단을 지양하는 길에서 진리를 깨달았다. 이 두 극단을 지양한 길을 원시불교에서는 ‘중도’라고 불렀다.

이 중도의 구체적인 실천항목을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이라 하여 ‘팔정도’라고 하였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신념[], 바른 명상[] 등이다.

팔정도의 이론적·교리적 근거로는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네 가지 진리는 첫째 고[]를, 둘째 고의 근원[]을, 셋째 고에서 해탈함[]을, 넷째 고에서 해탈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인간의 존재를 ‘고’로 파악한 초기 경전은 인간의 탄생도 고이고 늙어감도 고이고 병()도 고이고 죽음 역시 고이며, 미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고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함도 고이고, 가지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함도 고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인간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요소나 정신적 요소가 모두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팔정도와 사성제는 부처가 깨친 뒤 제일 처음 말한 초전법륜()으로 알려져 있다. 이 초전법륜의 내용은 그 뒤 설명형식과 방법은 달라졌다 해도 불교교리의 기본적 골격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불교의 실천요목을 계()·정()·혜() 삼학()의 체계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계는 불교가 가르치는 이상인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수행자가 날마다 실천하여야 할 생활규범인 계율이다.

계율은 생활규범이므로 출가수행자와 재가수행자,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근본 5계인 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란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 등은 누구나 지켜야 하는 규범이다.

그렇다고 계율만 엄격히 지키는 일은 윤리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계율에 근거하여 보다 높은 거룩한 종교적 체험을 얻기 위하여는 종교적 수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즉 명상, 정신적 통일, 지관()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선정()이라고 한다.

이 선정은 가만히 앉아 있는 소극적·부정적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감각의 세계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무아()의 적극적 자세로 전환하여 자유의 경지를 개발하는 것이 선정의 본분이다.

그러나 선정이 주관적 환상에 빠지지 않으려면 바르고 엄격한 계율적 실천이 앞서야 한다. 따라서 바른 선정은 계율에 의하고, 또 계율은 바른 선정에 의하여 거룩한 종교적 차원으로 고양된다.

그러나 계율과 선정 그 자체가 최종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해탈에 이르는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길에 지나지 않는다. 윤리적 계율에 의하여 마음과 몸이 청정해진 사람이 선정에 의하여 이르는 최고의 경지가 이 지혜이다.

이같은 지혜를 불교는 반야지()라고 하여 다른 유형의 지혜와 구별한다. 이 반야지는 곧 해탈이고, 불교에서는 각()이나 오()의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원시불교 시대

이러한 근본교리를 중심으로 석가는 45년 동안 교화활동을 하며 승단()을 이끌다가 80세가 되는 기원전 543년 열반에 들었다. 승단은 마하가섭() 등이 중심이 되어 석가가 제정한 율()과 교법()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 때 제자들은 불교의 교법을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석가가 듣는 사람의 바탕과 능력에 맞추어 수기설법()한 것을 결집(:부처님이 말한 내용을 묶어 정리함)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는데, 이것을 ‘제1결집’이라 한다.

왕사성()에 500명의 비구()들이 모여서 마하가섭을 사회자로 하고 우바리()가 율()을, 아난()이 법()을 암송하여 불설()의 내용을 서로 검증하고 확인한 것이다.

그 뒤 불교는 마가다국을 근거지로 여러 도시의 왕후와 일반 서민의 귀의를 얻으면서 각지로 전파되어 갔다. 특히, 기원전 317년경 찬드라굽타(Chandragupta)에 의하여 인도 최대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아왕조가 성립되고, 이 왕조 제3대 왕 아소카(Asoka, )가 즉위한 뒤 불교는 비약적으로 팽창하여 카슈미르·간다라지방을 비롯한 인도의 각 지역과 박트리아의 그리스 식민지역, 스리랑카·버마 등 국외에까지 전파되었다.

아소카왕은 열렬한 불교신도로서 법()인 진리에 의한 통치를 지도이념으로 삼는 등 불교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왕이다.

부파불교시대

그러나 불교의 급속한 팽창과 유통은 일면 교단 자체의 질서면에서 많은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것은 드디어 교파분열을 초래하였다.

석가의 열반 후 100년경, 계율의 해석 차이로 인해 전통적 보수파와 진보적 자유파가 대립되어 두 개의 부파를 낳았다. 전자를 상좌부(:장로를 중심으로 한 지도층)라 하고 후자를 대중부(:젊은 승려를 중심으로 한 일반층)라 한다.

부파 발생의 원인은 부처의 교설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교단질서확립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유래되었다. 불멸 후 100년경 베샬리(vaisali)에서 비구의 ‘10사()’를 두고 합법임을 주장하는 측과 비법()이라고 반대하는 측이 대립되어 분열된 것이다. 비법이라고 주장한 측이 700명의 비구를 모아 집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제2결집’이다.

이때 상좌부는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길은 감각적 욕망의 근원을 끊기 위해 엄격히 계율을 지키는 출가자의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고, 그 목표는 마음과 육체의 안정을 얻어 최고성자인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부처도 아라한에 이른 성자의 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대중부에서는 중생도 본질적으로는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여, 중생과 부처가 동일한 것이며, 따라서 윤회가 그대로 열반이라는 이론을 전개할 근거를 마련하였다.

부파는 계속 분열되어 서력기원을 전후하는 시기에는 각각 18개 또는 20개 정도의 부파를 형성하였다. 최초의 근본분열은 계율해석의 학술상 차이에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학설보다 지도자인 장로()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체계를 달리하였거나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서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는 일도 많았다.

대표적 부파로는 설일체유부()·독자부()·설산부()·화지부()·음광부()·경량부() 등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부파적 전개는 외적 확대와는 달리 부처님 당시의 순수성이나 참신함을 잃고, 율()과 경()에 대한 훈고학적인 주석학을 중심으로 하는 아비달마() 불교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또한 불교는 승원() 중심, 출가 중심의 학문불교로 변화하여 대중성을 잃어갔고, 일부에서는 저급한 미신적 신앙에 친화감을 가지게 되어 석가 당시의 탄력성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립해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운동이 진보적 입장을 대표하던 대중부 및 재가()의 불교도가 주동이 되어 일어났다. 이것을 대승불교운동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의 흥기

대승불교가 흥기한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나, 움직임의 태동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승불교의 대두로 인하여 이전의 상좌부를 중심으로 한 불교를 통칭하여 소승불교라 불러, 대승불교와 함께 오늘날까지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2대유파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대두로 소승불교가 쇠퇴 또는 소멸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라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계속 부파로서의 발전을 보였고, 그러한 세력은 스리랑카를 위시한 남방제국으로도 퍼져나갔다.

스리랑카의 경우 부다다타(Buddhadatta)·부다고샤(Buddhaghosa)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소승불교의 기지로서 태국·미안마·캄보디아·라오스 등지에 남방불교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소승에 대한 대립적 자세를 취하며 일어난 대승불교는 종래의 관점을 혁신하였다. 수행관()에 있어서 자기해탈을 주장하는 대신 대중의 구원을 선행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소승의 최고성자 아라한 대신에 보살()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였다. 또 이미 열반에 들어간 역사적 부처 대신에 미래의 초월적 불신관()을 내세웠다.

이러한 변화는 쟈타카(jataka), 아바다나(avadana) 및 아비달마의 우주론의 확립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상이 조직적으로 종합되면서 새로운 대승경전이 만들어졌다.

1세기 후반에 쿠샨왕조가 성립되고 제3대 왕인 카니슈카(Kanishka)가 즉위한 뒤 불교는 또 한 차례 흥왕기를 맞게 된다. 북인도의 대부분과 서인도 북반(),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던 카니슈카 왕은 국내 각지에 불탑()과 사찰을 건립하고 적극적인 불교보호정책을 썼다.

이때 불교는 파르티아(Parthia)·속디아(Sogdia)지방에까지 보급되었고 이 시기부터 이곳의 학승()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 번역에 종사하였다. 그것은 쿠샨왕조의 영토가 광대하여 중국의 문화와 쉽게 닿을 수 있는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간다라지방에서 마투라지방에 걸치는 지역은 아직 부파불교가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설일체유부를 위시한 대중부·음광부·법장부·화지부 등 여러 부파불교가 병립한 상태에 있었고, 그 중 설일체유부가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파가 중심이 되어 아비달마불교를 더 한층 발전시켜, 그 결과 유부() 학설의 총서인 ≪대비바사론 ≫이 카슈미르지방 학승들의 손에 의해 편찬되었고, 이 논서를 중심으로 한 학문경향이 성행하게 되었다.

대승불교의 주요사상

이와 같이 부파불교적 경향이 지배적인 시기에 대승운동은 계속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하여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 사이에 대승운동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대승경전들이 출현하였다.

초기 대승경전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반야경≫·≪법화경≫·≪유마경≫·≪아미타경≫·≪십지경 ≫ 등이다. 이 가운데 ≪반야경≫은 대승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실린 공사상(, )은 대승불교의 기본적 교리로서 불교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었다.

그 뒤 이 공사상을 확립한 대표적 인물은 남인도 출신의 용수()로서 그의 ≪중론송 ≫은 부파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하였다.

용수 이후에 여래장사상을 천명한 ≪승만경 ≫·≪해심밀경 ≫·≪능가경≫ 등이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해심밀경≫의 유식설()은 270∼480년 사이에 미륵()·무착()·세친()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사상으로, 용수의 공사상과 함께 불교사상의 2대 조류를 형성하는 학설이 되었다.

용수는 불교의 기본교리인 연기()를 보다 심오한 체계로 전개하여 경험에 나타난 모든 대립을 부정하는 절대적 일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대립의 도식()을 생과 멸(), 오는 것과 가는 것, 중단과 계속, 같은 것과 다른 것 등으로 분류하였고 중생과 부처, 윤회와 열반은 본질적·일원적 입장에서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 본질적 동일성을 아는 지혜가 반야라고 하였다.

또한 용수의 학설과 항상 대립되는 입장을 지닌 무착과 세친의 유식사상은 용수의 절대적인 일원론의 입장을 시인하면서도 인간 존재의 구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상당히 복잡한 관념론을 내세웠다.

그들은 이 세상이 사유적 구성()으로 되었다고 주장하고, 사유를 떠나서는 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결국 외계라고 생각하는 것도 주관적 사유의 투영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의식의 흐름, 즉 아라야식(alaya)뿐이라는 것이다. 즉, 아라야식이 새로운 행업()을 쌓음으로써 일정한 경향을 형성하고, 이 형성에 의하여 사람의 성격도 결정된다고 보았다.

공사상과 유식사상은 세친 이후 2대학파를 형성하였고, 7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두 학파는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관학파는 용수 이래 불호() 계통과 청변() 계통으로 나뉘었고, 다시 전자는 월칭()과 적천()이 계승하였으며, 후자는 적호()와 연화계()가 계승하였다. 유식학파는 세친을 계승한 진나() 계통과 덕혜()·안혜()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다시 호법()과 법칭()이 계승하였다.

이 시기는 불교사상에 있어 난숙한 발달을 보인 시기였는데, 이들은 불교 내부에서 상호간 활발한 논쟁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힌두교와 자이나(Jaina)교의 종파들과도 논쟁을 벌였다. 인도불교는 이와 같이 대승불교를 중심으로 발전을 계속하였고 그 학문적 전승을 위해 나란타사원이 국제대학으로서의 구실을 하였으며, 발라비사원도 불교학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열정은 감퇴되기 시작하여 종교생활은 나란타·발라비·비크라마시라와 같은 대학으로 집중되었고, 이른바 승단 중심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밀교의 성립

7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시기에는 새로운 불교의 대두를 보게 된다. 곧 밀교()의 발흥이다. 밀교사상은 석가 당시부터 주법()으로 전해오던 주구()·진언(mantra)·다라니(, dharani)를 송지()하면서 그것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구경의 경지에 도달하여 불()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의 일파이다.

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 종합되어 ≪대일경 ≫·≪금강정경 ≫과 같은 문헌으로 나타남으로써 밀교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이 밀교도 대승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대승불교의 퇴영적 일면을 드러내는 사상으로 평가된다. 그 발생 이유는 세친 이후 대승불교가 지나친 철학적·이론적 경향으로 흘러 일반대중과 멀어졌고, 마침내 아비달마불교가 빠진 것과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인도에서 탄트라(tantra)문학이 유행하게 됨에 따라 불교의 밀교적 전개가 촉진된 것이다. 특히 중관사상이 밀교화되었으며, 따라서 밀교는 힌두교사회에서 환영받아 급속히 보급되었다. 8세기 후반에 와서는 밀교가 대중화됨과 동시에 저급한 의례를 도입하기까지 하였다.

밀교의 대중화는 또 다른 불교유파인 금강승()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을 일으킨 사람은 인드라부티(Indrabhuti)였다. 그의 아들 연화생()은 밀교를 티베트로 전하였고, 이때 인도로부터 다수의 고승이 티베트에 들어가 밀교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티베트에는 이미 중국에서 온 학승들이 있었는데 이들과 인도학승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생겨 혼란을 일으켰다. 이에 티손데첸왕은 수도 라사(Lhasa)에서 회의를 열어 논쟁을 매듭지었다.

그 결과 인도측 점문파()의 설이 인정되고 중국의 돈문파()의 설이 배척되어, 티베트 불교는 인도 후기의 불교의 성격을 그 주류로 삼게 되었다. 티베트로 들어간 밀교는 머지 않아 라마교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것은 티베트 고유의 종교로 정착하게 된다.

인도불교의 쇠퇴

금강승불교가 팔라왕조(750∼1199)의 보호를 받으며 마가다지방과 서벵골지방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나, 이때의 불교는 거의 힌두교나 다를 것이 없는 상태로 변질되어 버렸다. 불교의 세력은 오히려 중국·우리 나라·일본에서 흥왕을 보았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것은 불교 자체가 내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미륵불·관음보살·대일여래 같은 불보살들이 힌두교의 여러 신들과 거의 같은 성격과 기능을 가지게 된 점에 있다.

또한 10세기 말에, 아프가니스탄지방에 있던 터키계의 가즈니왕조는 1001∼1027년에 17회나 북인도를 침략하여 많은 노예와 전리품을 얻어갔다.

그때 점령지는 오래 지배되지 않았으나 불교와 힌두교의 사원이나 성지에 대한 파괴와 약탈, 승려의 학살은 세계사상 그 유례가 드물 만큼 철저하였다. 그 뒤에도 이슬람교도의 침략과 파괴는 계속되었다. 1203년 비쿠라마실라사원의 파괴와 더불어 불교는 인도 본토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불교 [佛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12-17

인도불교사

 

 

< 불교 흥기의 배경 >

 

기원전 6세기의 인도는 옛날 질서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과정이 역동적이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인도문화는 두 가지 관점에서 격변의 시대를 보냈다. 첫째는 종교와 철학의 변화와 발전이며, 둘째는 사회질서 및 고대국가 체제의 정비다. 좀 더 세분화 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베다시대가 막을 내리고 브라만교가 성립되었으며, 우파니샤드 철학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시대이다.

2.     불교와 자이나교를 비롯한 사문들에 의해 새로운 사상이 전개되면서 브라만적 가치관을 압도하기 시작하였다.

3.     유목생활에서 농경기반으로 한 도시문명이 건설되면서, 기존의 사회질서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BC 6C, 북인도 군소 국가들이 끊임없이 전쟁을 통해서 통일왕조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왕권이 강화되었다. 이전에는 단순히 싸움 임무만 강조되었던 크샤트리아 계급이 점차 통치자인 왕족계급으로 성장하면서 이전의 상위 계급이었던 브라만 사제들과 갈등이 일어났다.

왕권의 신장과 상공업의 발달은 브라만 중심사회의 질서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은 사문들에 의한 새로운 사상이 전개되었고, 이러한 사문들의 지지세력은 평민계급이었던 바이샤였다. 바이샤 계급의 장자(부호)들은 경제적 부를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신장하기 위해서 크샤트리아 계급과 손을 잡게 되었다. 당시 크샤트리아와 바이샤가 브라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길은 종교 혹은 사상의 대체였다. 이와 같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한 것이 불교와 자이나교였다.

 

용어 : 바라문 = 브라흐마나 = 브라흐만(Brahman.범어) = 브라만( 카스트제도의 승려계급 )

= 음성이나 언어 속에 감추어진 呪力 = 베다의 찬가

용어 : 브라흐마나 祭官 = 바라문 제관 = 주술의 힘(Brahman)을 구사하는 사람.

용어 : 사문( 沙門, = sramana 슈라마나 ) = 바라문적, 바라문적 새로운 사상가

= 석가모니 부처님도 슈라마나 중의 한 사람으로서 신흥종교의 지도자이다.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였다.( 카스트제도에 대한 평등주의 주장, 아트만에 대한 부정

) 부처님 당시 BC 6C~5C경 인도에는 바라문교라는 초기 힌두교가 있었다.

용어 : 아리아인들의 인도 침입 è BC 15C경에 펀잡(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에 침입하여 무력으로 정복하였다. 당시 아리아인은 청동기를 사용하고, 원주민이었던 문다족과 드라비다족은 석기를 사용하고 있어, 무기에 관한 한 원주민은 아리안의 적수가 되지 못 했다. 그 당시 아리아인들은 사제계급, 무사계급, 평민계급이 있었고, 피정복자인 원주민을 노예계급으로 편성하여 사성제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용어 : 아리아인들은 자연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의인화한 신들을 숭배하였는데, 그 중에 번개의 신인드라라고 하였다. 인드라는 당시 아리아인들이 가장 영웅으로 숭배하는 신이었고, 불교에서도 外護神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중국, 한국, 일본으로는 帝釋天으로 전래되었다.

 

 

< 부처님 당시의 여섯 사상가들 >

 

불교가 발생한 시기를 전후해서 인도 사회에는 자유사상가들이 사회를 풍미하고 있었다. 이들을 불교경전에서는 육사외도라고 한다. 그 당시 62가지 사상이 난무했다.

1.     아지따 께사깜발라

A.     보시에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

B.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다.

2.     뿌라나 까싸빠

A.     선악과보의 인과론을 부정

3.     막칼리 고살라

A.     인간이 번뇌 속에 있거나 청정하거나, 거기에는 아무런 도 없다.

B.      인간의 노력과 정진을 부정하며, 운명결정론을 주장.

4.     니간타 나따뿟따 = 자이나교의 교주

A.     네 가지 계율 ; 불살생, 불투도, 불망어, 무소유

B.      모든 생명에 영혼이 있다고 인정하고, 아힘사(不害사상)을 주장

5.     뿌꾸다 깟짜야나

A.     인간은 7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B.      ......靈魂

6.     산자야 벨랏티뿟따 = 회의론자

A.     선악의 행위에 대해 과보가 있을지 없을지 판단할 수 없다. 판단중지를 주장.

B.      산자야의 두 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 유행기 운동의 확산 >

 

인도 전통종교, 브라만교에서는 인생을 네 단계로 구분한다.

1.     범행기

2.     가주기

3.     임서기

4.     유행기

후기 베다시대에는 유행기가 생략되고 세 단계로 변하였다. 그러나 사문 전통은 가주기와 임서기를 거치지 않고 바로 유행기로 나아가는 특징을 보인다. 석가모니부처님도 마찬가지였다.

 

 

< 불교 연대 >

 

남방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열반을 BC 543년으로 본다. 그리고 1956년을 불기 2500년으로 본다. 불기의 기원은 부처님 탄생이 아니라 입멸로 본다. 그러므로 탄생시기는 올해 기준으로 2558 + 80 = 2638년으로 봐야 한다.

 

 

< 초전법륜과 전도 >

 

Ø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를 대상으로 법문

Ø  야사를 비롯한 54명의 청년들이 출가

Ø  위의 60명 아라한들을 대상으로 전도선언을 하였다.

Ø  당시 우루벨라에는 불을 섬기는 이교도들이 있었다. 그 중에 까싸빠 삼형제가 있었는데 각각 500, 300, 200명의 무리를 이끌고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리고 육사외도 중의 한 분인 산자야의 제자, 목갈리나와 사리풋다가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 부처님의 교화와 열반 >

 

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성도한 후, 45년간 북인도 일대를 다니면서 교화(포교)활동을 하였다. 그래서 조계종의 모든 스님은 포교사이어야 한다.

Ø  카필라국이 코살라국에 의해 멸망하고, 코살라국은 마가다국에 의해 멸망한다.

Ø  비구니승단의 성립( 이모 )

Ø  데바닷따의 반역( 사촌 )

Ø  앙굴리마라 교화

Ø  사리풋다와 목갈라나가 먼저 열반

Ø  웨살리에서 3개월 후에 열반에 들 것이라고 선언

Ø  대장장이 아들 쭌다가 올린 공양을 드시고, 속탈이 난 상태에서 쿠시나가라로 향한다.

Ø  쿠시나가라에서 수밧다를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인다.

Ø  마지막 유훈 : 자등명 자귀의, 법등명 법귀의, 以戒爲師 不放逸

Ø  상수제자 마하가섭이 도착한 후, 다비되어 8개국 10기의 사리탑이 세워졌다.

 

 

< 부파불교 >

 

Ø  단일 교단의 불교가 여러 학파로 나뉘어 발전한 시기를 말하며, 2차 결집(근본분열) 이후부터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12세기경(?)까지를 포괄한다. 대승불교는 부파불교시기에 일어난 혁신운동이기에 부파불교가 끝난 후에 대승불교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부처님 열반 후, 100년부터 300년까지로 보고 있다. 부파불교를 아비달마불교라고 함.

Ø  부파불교의 발생원인은 계율해석 차이, 철학적 해석차이, 지리적.언어적 해석차이 등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불교 내부의 개혁과 외적인 조건의 변화가 함께 반영된 결과물이다. 남전 18부파, 북전 20부파설이 있다.

Ø  의미1 ; 단일 교단이 분열되었다는 부정적인 의미.

Ø  의미2 ; 불교의 다양성과 시대적 변화에 적응

Ø  의미3 ;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경전을 문자기록으로 발전

Ø  의미4 ;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이론을 체계화한 결과 아비달마로 일컫어지는 방대한 논서로 집대성되었다.

Ø  의미5 ; 수행론의 체계적 발달과 철학과 논리학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논서는 불교의 철학적, 교학적 내용을 풍부하게 하였으며, 대승불교 흥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대승불교의 흥기 >

 

Ø  부처님 이래 불교가 질적으로 양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된 시기는 마우리야 제국의 아쇼카왕 덕분이다. 아쇼카왕은 불교장려 정책뿐만 아니라, 주변국으로 불교를 확산시키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Ø  한편, 마우리야 왕조를 붕괴시킨 후, 슝가 왕조(BC187~BC75)와 깐바 왕조는 브라만계급 출신이 왕이 되어, 부라만교와 결탁하여 불교를 박해하였다.

Ø  그 후 쿠샨제국의 등장과 더불어 대승불교가 크게 발전하게 된다.

Ø  대승불교를 마하야나라고 한다. 즉 큰 수레라는 의미로써 개인의 해탈에서 벗어나 모든 중생을 해탈로 인도하는 보살사상을 강조한다. 보시와 공덕을 강조한다.

Ø  대승불교는 다불사상으로 아촉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등을 널리 신앙하였다.

Ø  대승불교의 특징은 교화방식에 있다. 보살신앙, 주문(다라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 대승불교 주요학파 >

 

Ø  중관학파 ; 나가르주나( 용수 ) ; 반야사상의 공과 연기사상을 체계화, “중론

Ø  유식학파 ; 아상가( 무착 )

Ø  유가행중관학파 ; 샨따락쉬따( 적호 )

Ø  여래장사상 ; 유식학파의 심리분석의 영향을 받음.

 

 

< 불교의 쇠퇴 >

 

Ø  쿠샨왕조 이후, 굽타왕조 시대에는 브라만교가 힌두교로 변모하여 인도의 중심사상과 종교로써 재등장한 시기이다. 불교가 왕권강화 논리에 밀려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다.

Ø  굽타왕조 이후 인도는 8세기 초부터 간헐적으로 이슬람의 침입을 받았고, 11세기 경부터 본격적으로 공격을 받아 이슬람교에 밀려, 12세기 초에는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졌다.

Ø  이 시기에 이슬람의 공격은 불교 뿐만 아니라 힌두교와 자이나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불교만 인도에서 사라지게 된 이유는 불교가 인도사회에서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즉 대중들로부터 필요성을 인정받지 못한 상황에서 이슬람의 무자비한 공격은 불교가 소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Ø  델리왕조가 1203년에 날란다사원을 소멸시키면서 인도불교는 종언을 고하였다.

Ø  인도에서 소멸된 불교는 티벳과 중국을 거쳐서 동북아시아로 전래되고, 그리고 스리랑카와 미얀마, 태국을 거쳐 서남아시아로 전래되면서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했다.

Ø  힌두교와 자이나교가 이슬람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 살아 남았으나, 세계종교로 발전하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Ø  인도에서 다시 한 번 불교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등장한 것은 1891년 스리랑카의 다르마빨라 스님이 마하보디협회를 창립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1956년 인도 초대 법무장관을 역임한 불가촉천민출신의 암베드까르 박사의 집단 개종(신불교)운동을 계기로 인도에서 불교가 발돋움하고 있다. 그리고 1971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인도 종교인구의 약 0.71%를 불교가 차지하고 있다. 힌두교가 83%이고,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 순이다.

Ø  이러한 운동은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다람살라에 티벳 망명정부가 들어선 것도 인도불교의 재도약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인도 정부는 라닥에 불교학중앙연구원을 설립하여 불교중흥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한편 불교는 힌두교의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제도를 개혁해 나갈 수 있는 종교로써 성장해가고 있다.

 

 

< 밀교의 등장 >

 

Ø  6세기까지를 초기밀교 ; 힌두교 영향으로 대승불교에 밀교의례가 침투

Ø  7세기까지를 중기밀교 ;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교리를 수용. 사상과 실천체계 정비

Ø  8세기이후를 후기밀교 ; 힌두교의 샥띠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Ø  밀교의 특징 : 다라니, 만트라, 명주를 들 수 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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