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된 신'에 매인 사람들
일본을 덮친 지진과 쓰나미를 신의 징계로 해석하는 목사님들이 우리나라에는 적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신은 '인격신'으로 이해되었기에, 신이 사람처럼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자신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그 뜻을 거스르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분으로 이해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게다가 그 신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또한 세상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우주만물을 직접 섭리하는 분으로 고백됩니다. 이런 신앙관에 의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우연이 있을 수 없고, 모든 존재와 현상은 신의 의지에 따라 관장됩니다.
이런 신앙은 마치 프로그래머에 의해 철저히 조종되고 통제되는 컴퓨터처럼 신에 손아귀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론적 세계관을 갖게 합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우리 세상사에 일일이 관여하시기에, 무슨 일이건 다 하느님께서 일일이 지휘하시는 가운데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본 지진과 쓰나미를 기독교의 신을 믿지 않은데 대한 징벌로 해석하려는 신앙을 '신의 전능성'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신은 '전지전능하지만 무자비한 신'이라고 정의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은 '전능하신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하느님'으로 고백됩니다.
일본의 재해를 '신의 징계'로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는, 지진과 함께 일본 동북부를 덮친 쓰나미가 신을 거부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만 가려서 '처벌'한 것이 아니라 종교 여부를 가리지 않고(만 명이 넘는 희생자 중에 기독교인은 한 명도 없었을까요?), 또한 남녀노소 심지어는 갓난아이까지 구분하지 않고 한꺼번에 '쓸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면,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들은 이천년 전의 원시세계관에 의해 형성된 교리가 과학에 의해 밝혀진 요즘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지만, 기독교 신념체계를 절대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좀처럼 자신의 신념을 수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서 안에 기록된 비슷한 종류의 신의 징계를 너무 많이 알고 있고, 그 모든 기록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신도 죽이고 성서도 파기하라
'살부살조'. 선불교를 말할 때 폭넓게 회자되는 말입니다. 선(禪) 수행 중에 부처가 와서 방해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선사, 먼저 깨달은 자)가 와서 방해하거든 조사도 죽이라는 말입니다. 그 무엇에도 매이지 말고 오직 깨달음에 정진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저에게는 큰 깨달음을 주는 지혜의 말씀이지만, 교리와 전통의 절대성을 주입받고 살아온 기독교 신앙인들은 감내하기 힘든 말입니다. 진리를 깨우치는 데 방해가 되면 신도 죽이고 예수도 죽이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기독교가 불교처럼 모든 교리와 전제를 내려놓고 살부살조의 정신을 배울 수 있다면, 그래서 신도 죽이고 성서도 파기하는 '살신살서(殺神殺書)'의 정신을 가질 수 있다면, 기독교는 이천년 동안 내려온 교리의 우상에서 벗어나 더욱 생동적인 종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신을 죽이기 어렵다면 적어도 '기록된 신'과 '해석된 신'은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경전과 교리를 통해 알고 있는 신은 이천 년 전의 선조들에 의해 '해석되고 기록된 신'이며, 그 기록과 해석의 껍질을 벗겨내고 돌파하지 않고는 참 하느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교리기독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우상종교입니다. 사람의 문자로 기록된 신, 이천년 전의 시대적 배경과 한계 안에서 해석된 신을 절대화하는 것 자체가 (기독교 용어로)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그 우상을 돌파하고 넘어서지 못하면 기독교는 영원히 우상종교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백의 언어'와 '사실의 언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신앙은 위험하다
일본 재해가 '기독교 신의 징계'일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열어두려면 신의 '전능성'과 '사랑의 속성' 중에서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의 신은 '전능하지만 무자비한 신'이거나 아니면 '사랑의 신이지만 재난을 막을 힘은 없는 무능력한 신'이 됩니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독교 교리가 정리한 신의 속성은 오래 전 고대세계관에서 살았던 교회공동체 사람들의 고백일 뿐 객관적 사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성서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을 기록한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이나 믿음을 상징의 언어로, 또한 고백의 언어로 기록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의 많은 기록은 '사실에 대한 보도'가 아니라 '고대인들이 본 신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홍길동전에는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홍길동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록을 읽으면서 "홍길동이라는 사람은 정말로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졌구나."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 기록은 사실의 보도가 아니라 홍길동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기독교 성서를 홍길동전과 비교한다고 화를 내는 독자가 계실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성서에는 많은 '이야기'(설화)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 탄생에 대한 이야기'(탄생설화)도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설화에는 모세의 탄생설화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탄생했을 때 이집트 왕 파라오가 갓 태어난 사내 아기들을 죽였다는 기록이 성서에 등장하는 것처럼, 예수의 탄생설화에도 헤롯이 두 살 이하의 사내 아기들을 죽였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사실의 보도가 아니라 예수의 태어나심이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와 견줄만큼 위대한 탄생이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의 보도가 아니라 '이야기'라 하여 허구라고 쉽게 단정 지어서는 안됩니다. 홍길동전이 사실이 아닌 이야기지만 그냥 허구가 아니라 당시 사회의 부도덕과 차별을 고발하고 새 세계의 도래를 희망하는 염원이 담겨있는 것처럼, 성서의 기록은 그냥 허구가 아니라 절대 평화와 정의의 세계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갈구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산 소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기록에 역사적 사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제국의 존재, 당시의 통치자가 아우구스투스였다는 점 등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서에는 많은 신화와 전설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것은 마치 단군신화에서, 오래전 한반도에 종교와 정치를 함께 관장한 지도자로 단군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자와 곰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의미를 담은 이야기'라는 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성서에는 신의 징계를 말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고대세계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천애인(하늘공경 이웃사랑)의 정신을 갖고 살아가게 하려고 당시의 선각자들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입니다. 기독교 용어로는 신의 메시지를 전달한 선지자들의 예언이 되겠습니다.
이처럼 성서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도 있고, 신화와 전설의 기록도 있습니다. 역사는 역사로 이해해야 하지만, 신화와 전설은 이야기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를 사실의 보도로 이해하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 본 기사는 <공동선> 2011년 5+6월호에 기고한 글이며, 내용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기사입력: 2011/05/15 [11:33]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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