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비운다는 것은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것 ( 우룡 스님, 경주 함월사 조실 ) - '법공양' 통권 175호

圓鏡 2012. 4. 27. 23:52

톡톡 튀는 한 생각이 번뇌의 뿌리

 

세세생생토록 버릇을 잘못 익힌 우리에게는 어디를 가든지 톡톡 튀는 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마음 그 자체가 실체가 없는 것인데, 거기서 다시 '좋다.싫다', '어긋난다.맞다', '괴롭다.즐겁다' 라고 하는 두 가지 상념들이 겹치면서 윤회의 세계 속을 허우적거리며 사는 모습이 우리 중생들의 현실입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것도 한 생각 움직이는 데서 생겨납니다. 결국 '나에게 맞으면 좋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싫다'는 그 생각이 우리의 의식 속에 엎드려 있다가, 어디에서건 톡톡 튀어 나옵니다. 더욱이 그 '좋다.싫다'라는 생각은 잠깐도 그치지 않고 계속 튀어나옵니다.

 

나의 분별심이 나의 망상심이 주춧돌이 되고 뿌리가 된 아상 자체가 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줄줄이 엮여져서 같이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나'라고 하는 것이 없어져버린 아공( 我空 )의 세계를 체험하고 나면, 나를 칭찬해주는 소리도 헛 소리가 되고, 나를 비방하는 소리도 헛소리가 될 뿐입니다. 좋다.싫다, 옳다.그르다, 깨끗하다.더럽다는 개념에서 벗어나 아무런 시시비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톡톡 튀는 한 생각이 전체의 뿌리가 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런 차이점도 없고, 어떤 시시비비도 없어지게 됩니다.

 

언제나 내 꾀에 내가 속고 살아가는 것이지, 남이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 꾀에 내가 속아서 일을 크게 만들고 진흙 바닥으로 끌려들어갑니다. 톡톡 튀는 한 생각이 모든 잘못의 뿌리가 되고, 허물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항상 조심하면서, 어떤 자리에서도 톡톡 튀지 않도록 마음 단속을 잘 하셔야 됩니다.

 

내 업은 내가 짓고,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는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대우주 법계의 이치입니다. 결국 내 마음가짐 하나에 따라 불가능이 가능으로 돌아가는 기운이 생겨나기도 하고, 가능이 불가능으로 돌아가는 반대의 기운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흔히 우리는 '예.할게요', '싫어요.안 해요' 등의 표현을 많이 합니다. 바로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내가 '예'라고 할 때, 여기에 불가능이 가능으로 돌아가는 기운이 생깁니다. 내가 '싫어요.못해요'라고 할 때, 여기에 가능하던 일이 불가능한 쪽으로 돌아가는 기운이 생깁니다.

 

꼭 명심하십시오. 내 마음 하나의 움직임이 대우주를 좌우하고 대우주를 회전시킵니다. 우리의 마음 가짐이 일의 성공과 실패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첫 대답은 '예'라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라고 할 때 불가능이 가능으로 돌아가는 기운이 생겨나고, 우리의 마음이 성공을 만들어 냅니다.

 

'예'라고 할 때에 대우주 전체가 '예'하는 쪽으로 회전을 하게 되고, '싫어요.못해요' 할 때에 대우주 전체가 반대쪽으로 회전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대우주와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내 마음 움직이는 쪽으로 대우주가 그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대우주는 태풍도 일어나고 지진도 일어납니다. 대우주에는 화산폭발도 일어나고 해일도 일어납니다. 장마가 오면 큰 비가 쏟아지듯이 우리의 마음 하나 움직임이 장마를 만들기도 하고 태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생활을 좀 더 잘 돌이켜보면서 주의 깊게 살아야 합니다.

 

번뇌의 뿌리가 되는 톡톡 튀는 한 생각,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한 생각 속에서 세세생생을 허우적거리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자신을 뒤돌아 보고 내 자신을 돌이켜보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싫다.좋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늘 마음 단속을 하여야 하면서 '내 마음가짐 하나가 대우주를 좌우한다' 는 이치를 생활속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된다면 불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보람되겠습니까?

 

내가 톡톡 튀는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내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내 마음이 고요해지면 내 몸이 따라 고요해지고, 내 한 몸이 고요해지므로 모든 사람이 고요해지며, 모든 사람이 고요해지므로 한 세계가 고요해집니다.

 

이와 같이 내 한 몸을 시작으로 해서 열 몸 백 몸 나아가 일체 중생의 몸이 고요해지고, 일체중생의 몸이 고요해지므로 한 세계 속에 있는 중생이 모두 다 고요해질 수 있습니다.

 

 

무조건 받아들여라

 

문제는 空입니다.  불교의 마지막 문제는 언제나 비우는 것, 곧 공입니다. 모든 것을 비우고 모든 것을 털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비워라.털어버려라' 고 하는 것도 결국은 말일 뿐입니다. 막상 비우려고 하고, 털어버리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로는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해야 비워집니까?

 

비우려고 하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조건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뿌리지 않은 씨앗을 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내가 뿌린 씨앗이 모두 내 발등에 떨어지고 내 가족에게 떨어집니다. 뿌리지 않은 씨앗이 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입니다.

 

어느 누구도 뿌려놓은 씨앗이 나에게 오는 그 결과에 대해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유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두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 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괴롭든 고달프든 서글프든 좋든 싫든 모두 받아 들여야 합니다.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비운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내가 뿌린 씨앗이 나에게 오는 것이니까 이유 없이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 받아들일 때 '싫다.괴롭다.고단하다' 등의 조건을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뿐입니다.

 

받아들여라. 조건없이 받아들여라. 空, 비우는 것은 무조건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무조건 받아 들인다는 것은 거울이 물건을 비추듯이 하는 것입니다. 붉은 것이 오면 붉은 대로 비추고, 푸른 것이 오면 푸른 대로 비출 뿐입니다. '왜 너는 그 만큼 붉으며, 왜 또 너는 그렇게 푸른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똥은 똥대로, 물은 물대로 비출 뿐입니다. 내가 똥을 뿌렸으니까 똥이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내가 성을 뿌렸으니까 성이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내가 짜증을 내보냈으니까 짜증이 나에게 오고, 내가 신경질을 내보냈으니까 신경질이 나에게 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보내지 않은 것은 나에게 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나 자신은 어떻습니까?  내가 내보내고 내가 뿌린 씨앗에 대해 전부 거부감을 가지고 '싫다.고달프다'며 회피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 열매가 내 발들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모두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뿌려놓은 씨앗이니까 조건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만 받아들일 때는 거울이 물건을 비추듯이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이, 나간 것은 반드시 들어오게 되어 있고, 들어온 것은 반드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이, 들어온 것을 다시 내보낼 때 절대 조작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들어온 대로 그대로 내보내야 합니다. 나에게 다시 내보낼 때, 갑이나 을에게만 해당되는 식으로 내보내지 마십시오. 남자, 여자나 어른, 아이, 100년 전이나 100년 후, 1000년 전이나 1000년 후의 사람, 그 어느 누구에게도 꼭 같이 해당이 되도록 내보내야 합니다. 거기에 아무런 물도 묻히지 마십시오. 붉은 물도 묻히지 말고, 푸른 물도 묻히지 말고 그대로 내보내야 합니다.

 

내보낸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것은 또 그대로 내보내야 합니다. 여기에 나의 인위적인 조작을 붙이면 안 됩니다. 어떤 인위적인 조작도 붙이지 않고 그대로 회전만 되면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요 '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흔히 공이다, 무다하면 착각을 합니다. 여기에 어떤 실체가 있다가 없어진 것을 공이나 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나 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 있다가 없어진 상태를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붉은 것은 붉은 대로 받아들이고, 푸른 것은 푸른 대로 받아들여, 나의 인위적인 장난을 붙이지 않고, 자연적으로 회전되는 그대로에 맡겨두는 것을 이릅니다.

 

대우주의 법칙이, 법계의 법칙이 그대로 회전하게 내버려두는 이 상태를 일러 불교에서는 공空이다. 무無다 라고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다 자꾸 무엇을 붙이려고 합니다. 나에게 오는 일이나 나에게 내보는 일들에 대해 모조리 내 감정이나 욕심 등의 인위적인 조작을 붙여버립니다.

 

동쪽 하늘에 뜬 해가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공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공이라고 하고 이것을 그대로 무라고 합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듯이 눈 앞에 있던 물체가 없어진 상태가 공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붉은 것을 내보내면 붉은 것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또 푸른 것을 내보내면 푸른 것이 들어오게 되는데 이 때도 푸른 것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로부터 다시 나갈 때는 지혜롭게 내보내야 합니다.

 

한 개인에게 부딪히는 감정이나 욕심으로 내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똑같이 평등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100년 전 사람이나 100년 후 사람이나 1000년 전 사람이나 1000년 후 사람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거부감이 없이 비평없이 모두가 '옳다'고 하며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보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불교에서 '비운다'는 것은 '조건없이 그대로 받아 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첫 단계는 나에게 들어오는 것은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오는 것 그대로 아무 조건 없이 받아 들이는 것이 결국은 비우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엇을 붙이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래야 비우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나에게 나갈 때도 지혜롭게 그대로 내보내야 합니다. 여기에 어떤 인위적인 조작을 붙이지 말고, 그대로 내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할 때, 대우주의 법칙이 자연적으로 회전하게 되며, 이 상태를 불교에서는 '공'이다 '무'라고 합니다.

 

낯 씻다가 코 만지기보다 쉽다.

 

우리가 경전을 들여다 보고, 책을 읽고, 법문을 듣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어디까지나 '말'입니다. '불(火)'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작용을 하지만, 우리가 불! 하고 말로 외친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의 혓바닥이 타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은 '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불교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불'이라는 말만 했지, 혓바닥이 타는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내 자신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언제나 말로 그치고 말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믿어지지 않는 일, 실제로 혓바닥이 불에 타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