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와 명상 ( 원명 주지스님 법문 )
순례라는 것은 종교를 초월해 근원에 이르기 위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수행방법이요. 종교적 실천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누구나 한 번쯤은 거룩한 곳으로 순례를 꿈꾸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어쩌면 누구나 자신의 근원으로서의 귀향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인간 성품의 근간을 이루는 정신적 유전요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순례자가 꼭 종교적이거나 영적일 필요도 없으며, 반드시 대자연과의 교감과 신비에 대한 뚜렷한 체험내지 신념이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산이 좋고, 여행이 좋고, 홀로 걷는 것이 좋으며,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앞에서 숨을 멈추고 바라볼 수 있는 작은 감수성이 있다면 그것을 애써 영적이니 종교적이니 순례니 하는 용어로 가두지 않더라도 그 본질에서는 결국 같은 길 위의 구도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때때로 삶을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방법 같은 것을 알려줘도 그것이 전혀 먹혀 들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만의 관점과 견해가 좋고, 싫은 어떤 견고한 틀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비우고 활짝 열 수 있어야 합니다. 가슴의 창이 닫혀 있으면 그 창으로 지혜도, 행복도, 풍요로움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닫힌 마음에는 늘 자신의 기존 관점이나 색안경으로 걸러진 선택적인 것들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갈 때는 언제나 빈 마음이어야 하고,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내가 옳다’고 여겨온 모든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친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자기고집 아상과 아견을 꽁꽁 움켜쥔 채 찾아간다면 부처님을 만날지라도 거기에 소통과 참된 이해는 깃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 자연, 즉 우주는 우리 자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늘 충만한 우주의 도움을 본인 자신이 스스로 닫음으로써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인연이 없는 중생은 부처님도 구제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명상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부정적인 사건이나 받아들이기 싫은 불쾌한 일일지라도 사실 그것 자체는 아무런 좋거나 싫은 분별이 없습니다. 그것 자체는 언제나 중립입니다. 그 어떤 사건도 그 어떤 상황도 사물도 사람도 모두 중립일 뿐입니다. 다만 거기에 우리의 생각이 공연히 좋다거나 싫다고, 옳다거나 그르다고, 불쾌하거나 부정적이라고 판단을 덧붙이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상황은 우리가 그 상황 속에서 판단과 생각에 휩쓸리지 않고, 길을 잃지 않고 온전히 그 앞에서 깨어 있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언제나 나를 돕고자 찾아온 감사한 경계가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가 아니라 그 온갖 것들과의 마주침 속에서 얼마나 깨어 있었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상황이나 사건 자체가 좋거나 나쁜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처한 의식의 상태, 마음의 방향이 그것을 좋거나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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