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회 소임을 맡아 봉사를 해오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낀 '친절봉사'에 대해서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느낀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친절이란?
상대방을 존중.존경하고 나를 낮추는 자세를 견지해야만, 친절함이 내 몸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친절이 내 몸 밖으로 나오려면, 내가 하심하지 않고서는 어렵다. 그리고 봉사를 하고자 하는 해당 분야에 어느 정도의 지식과 지혜를 갖추어야 친절함이 나올 수 있고, 신도도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친절하게 한다고 했는데, 말과 행동이 상대방의 수준에 잘 맞질 않아서 혹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여 언행의 수준은 고객의 입장에 맞추었는데 태도가 상대방을 불쾌하게 할 수도 있다. 또는 내가 무척 바쁜 순간에 누군가가 나에게 질문을 해서, 급한 김에 내 팽개치듯이 한 답변이 신도 입장에서는 무척 불편하고 거북해 할 수도 있다. 내가 바쁜지 안 바쁜지 상대방이 알 수가 없다. 그냥 나만 바쁜 것일 따름이다. 봉사자는 봉사자의 상황을 잘 모르는 상대방( 서비스를 받고자 하는 신도 )에게 그 사람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친절하게 하려면 우선은 상대방이 찾아온 목적이 무엇인지? 애로사항이 무엇인지 인내심을 가지고 충분히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메모를 하면서 제스츄어로 듣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중간 중간 요약해서 내용을 확인하는 관심정도는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다 듣고 나서, 질문이나 애로사항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상대방에게 확인을 한 다음, 그 자리에서 정확한 답변을 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불행스럽게도 내가 답변을 할 만한 정보나 지식을 갖추지 못 했다면, 솔직하게 잘 몰라서 당장 답변을 드릴 수가 없다고 양해를 구한 후, 주변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적당한 사람이 없다면 연락처를 메모해 두었다가 추후에 답변을 정리해서 전화상으로 전달하거나, 차후에 별도로 시간을 정해서 적임자와 면담을 하게 주선하는 것이 친절함이 될 것이다. 그러하지 못 하고,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어렴풋이 횡설수설 답하는 것은 찾아온 신도로부터 불신과 불만만 쌓게 될 것이다.
봉사란 ?
여기서 봉사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자원봉사를 의미한다. 시작은 누가 권해서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봉사자로 봉사하는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하는 봉사만이 진정한 봉사가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야 진정한 봉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누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봉사라면 빵점이 될 것이다. 서비스를 받는 신도 입장에서는 무척 불편하지만, 무상의 서비스이기에 뭐라고 클레임을 걸기도 쉽지 않아서, 심적으로는 진퇴양난의 상태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 될 것이다. 종교단체에서 봉사는 무엇보다 무주상 보시일 수 밖에 없다. 재보시이든, 법보시이든, 운력보시이든 간에.........
친절봉사란?
위의 두 단어를 조합해 보면, 상대방을 높이고 나를 낮춘 자세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 무상으로 뭔가를 서비스(보시) 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습관이다. 봉사자의 평균 나이를 50세 정도로 두고 본다면, 이미 나름대로의 습이 몸에 배어 있어서 의도적으로 하지 않고서는 자연스럽게 친절함이 몸 밖으로 나오긴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훈련되지 않고 의도적으로 친절봉사를 하려 한다면, 본인도 어색하고 서비스를 받는 신도입장에서도 어색할 수 있다. 그래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서 스스로 변화를 시도한다면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몸에 익혀온 친절함과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
그렇지만 변화를 기꺼이 시도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기대를 해볼 수도 있다. 내가 주인이 되어 변화를 시도한다면, 기분 좋게 큰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떠밀려서 단체로 하는 훈련에는 큰 기대를 하기 어렵다. 내가 하는 이 서비스가 다른 신도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진정으로 내가 한 번 친절해보았으면 하는 간절한 맘이 있다면, 친절함이 그 사람의 말과 몸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무상하다.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삼라만상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습은 그대로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틈바구니에 있는 이 오온에게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시대적인 변화 시간적인 변화에 나의 몸을 맞기고, 그것과 주파수 동기를 맞춰서 살아가는 사람이야 말로 무상함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며, 고통은 멀어질 것이다.
나도 몸으로 한 번 친절한 사람이 되어 봤으면.......... 원경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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