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無常 & 修行

圓鏡 2009. 6. 6. 07:13

 

 

늘 같지 않다. 변한다. '세상만사 모든 것들이 가만히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라는 말만 변하지 않을 따름이지 모두 다 변한다. 눈으로 보이는 만물이 그러할진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우리들의 마음이야 얼마나 자주 바뀌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고 살아 간다. 이것이 무의식적인 습관이 되어서 나도 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또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게 받아 들이지 않으면 어떠 했을까?  많은 갈등을 느끼면서 불편하게 살아 가겠지.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맘에 있어서 고요한 호수 위에 돌맹이를 던졌을 때 일어나는 물결과 같은 것이 아닐까? 늘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가 호수에 돌을 던지고, 폭풍우가 일고, 바람이 거세게 불면 잔잔하던 호수의 물은 크고 작은 물결을 바람 따라 일으키게 된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늘 고요한 상태만은 아니다. 때로는 격정적인 상황에 놓일 때도 있고, 때로는 기분이 좋아서 고조된 상태에 놓이고, 어떨 때는 가라 앉아 침잠한 상태일 때도 있다. 때로는 상대방에게 섭섭한 맘을 가질 때도 있고, 더 해서 분노심을 가질 때도 있다. 이러한 기분을 모두 다 밖으로 표출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의 수행 정도에 따라서 스스로 그러한 물결을 어느 정도는 정제를 해서 밖으로 나타낼 것이다. 그 마음 상태를 정제하고, 밖으로 표출되는 말과 행동의 수준에 따라 그 사람의 수행정도, 삶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을 잃은 언행 뒤에는 반드시 후회.참회가 뒤 따른다. 이것이 정상적인 삶일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일상적인 생활 중에 선배들로부터 삶의 지침을 듣고 배운다. 그러나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는 것과 행동 사이에는 수행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성을 잃는 순간에 머리 속에 든 데이타(삶의 지침)는 차단되고 감정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이런 상태를 방지하고자 하는 수단이 수행이 아닐까?

어제는 모처럼 전화를 통해서 고향소식을 들었다. 바로 우리 이웃집 어르신이 얼마 전에 유명을 달리하셨다고한다. 그리고 어제도 동네에서 초상이 있었다고 한다. 한 때에는 젊은 이들이 도회지로 나가서 동네 사람들이 줄어들더니, 이젠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시니 줄어든다. 명절에 동네에 꼬마 아이들 소리가 골목에서 들리면 그제서야 동네에 사람이 사는 것 같다라고 어르신들이 말씀하신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의 마을에는 골프장 클럽하우스가 들어서게 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언젠가는 고향 땅 제대로 한 번 밟아 보려면, 골프백 메고 가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내주에는 집안 어르신도 수술을 하신다고 하시고 ....... 이렇게 세상사는 변해가고 있다.  나도 변해야지 바람직한 방향으로......  출근을 하기 위한 토요일 이른 아침에 원경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