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책상 위에는 전화기 한 대와 노트북 컴퓨터 한 대가 놓여 있다. 그리고 노트북 컴퓨터 소책상 위에 명함첩, 마케팅 책자, 세미나 책자 몇 권이 꽂혀 있다. 한편 전면과 우측 나즈막한 칸막이 벽면에는 달력, 좌석배치도 등이 붙어 있다. 책상은 밝은 아이보리 색상의 우드이고, 서랍장이 별도로 떨어져서 움직인다. 그리고 여기저기 칸막이 회의실과 임원실 등이 있고, 바닥은 조립식 카펫으로 되어 있다. 물론 형광등은 40와트 긴 것으로 촘촘히 천정에 박혀서 아주 밝아서 낮이나 밤이나 책상 위의 조도에는 큰 변화를 느끼지 못 하면서 근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 비하면 깨끗한 사무실 환경에 함께 일하는
20여 년 전 오산공장으로 입사할 당시와는 사무환경에 큰 변화가 있다. 툭 트인 공간에 부서간 경계라고는 거리를 약간 띄어 놓은 것 말고는 없고, 칸막이라고 없었다. 책상과 캐비닛은 철제로서 책상 윗면이 회색인 것을 제외하고는 어두운 청색 내지는 짙은 회색들이 사무용 가구들에 많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그만큼 지금은 어두운 색상에서 대체적으로 밝은 색상으로 변화되었다고 느껴진다.그리고 천정에는 20와트짜리 짧은 형광등이 군데군데 달려 있어서 좀 어두웠던 것 같다. 그리고 책상은 철제 좁은 것과 붙박이 서랍장이 전부인 상태에서 전화는 부서별로 한 두 대 정도이고, 번호는 당연히 공용으로 사용된다. 지금이 개인전화 번호가 부여되어 있는 것에 비하고, 무선전화가 활성화 된데 비하면 과거에는 그만큼 사적인 활동이 제한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나 사무용 기기들이 대폭적으로 늘어난 것이 그 당시와는 많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 자주 사용한 것이 모나미 볼펜과 먹지였다. 그리고 통신문이라는 문서를 기안할 때에는 먹지를 대고 한 꺼 번에 서너 장 정도의 사본 문서를 작성할 수가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지금은 세상이 뒤집힌 거나 마찬가지이다. 우선 컴퓨터라는 기계와 팩시밀리.복사기.스캐너라는 복합기가 등장한 것이 그러하다. 문서작성 후에 뽑아 낼 수 있는 문서의 매수는 제한이 없고, 쉽게 편집이 가능하며, 보내는 것은 전자 메일형태로 통신망을 통해서 보내버린다. 그래서 수신자도 제한이 없이 보내고 싶은 사람 이름 석자만 입력하면 부서, 거리, 직위와 상관이 없이 동시에 전달이 되기 때문에 정보전달이 그 만큼 빨라진 것이 사실이다. 팩시밀리, 복사기 역시 마찬가지로 크게 사무혁신에 기여한 기기들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컴퓨터가 이 놈의 역할을 대신하므로 사용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복사기 대신에 많은 양의 자료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철필로 인쇄용지에다 쓰고서는 인쇄용 소도구를 사용해서 만들 수가 있었고, 좀 더 고급스럽게 하려면 청사진을 떠서 만들 수도 있었지만 절차가 복잡하고, 자료가 조악하였다.
작년 연초에 귀국하면서 내 맘은 조만간에 다시 중국으로 나갈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 내 생각과 행동에는 그 당시와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내가 이 순간 이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것이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결코 오랫동안 머무를 수가 없는 곳이다라는 생각과는 달리 행동은 그러하지 못한 것 같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일체가 무자성이고 그런 고로 공이라고 한다. 결국은 우리가 일체에 집착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매사에 집착을 하고 그로 인해서 번뇌를 가지게 되고, 그로 인해서 괴로움을 가진다. 이렇게 어렵게 까지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변화, 우리가 늘 살아가면서 양면성을 가지는 단어이다. 때로는 변화를 즐기려고 하고, 때로는 변화를 싫어하면서 안주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삼라만상이 변화되고 있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나서서 리드하려는 자세는 부족한 면도 있다. 그래서 그 변화에 끌려 다니고, 때로는 그 변화의 희생양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필연적인 현상으로 보고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위와 같이 눈으로 보이는 사무환경이 지난 20여년 동안 크게 바뀐 것처럼, 눈으로 보이지 않는 사무환경 또한 크게 변화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이 시대적인 사고의 변화, 기업의 문화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을 해서 오늘날 여기까지 함께 온 것이다. 그렇다면 잘 적응을 했다고 보면 되는 것일까? 그것보다는 적응하는 과정이 수동적이었을까, 적극적이었을까? 이 변화를 즐기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해왔었던가 ?
과거는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현재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선방에서는 이런 말을 종종들을 수가 있다. 대부분 젊은 층은 미래에 대한 비중이 가장 크고, 미래를 준비하고 그를 위해서 많은 투자를 현재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에서는 현재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잠깐 현재라고 하는 순간에 이미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시간에 초점을 두고 엄격하게 시간관리 개념에서 하는 말이 게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라고 하는 것은 가까운 과거와 미래를 한 꺼 번에 포괄적으로 묵어서 사용한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의 어느 기간 동안을 현재라고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하니 현재에 충실하면서 살아야 한다. 과거에 너무 매달릴 필요도 없고, 미래에 너무 큰 집착을 하면서 현재를 낭비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이 지나고 보면 과거가 되는 것이고, 내일이 지나면 오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결과가 미래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가 가장 소중한 시점이 될 수 있다. 현재를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다 보면 좋은 과거로 넘어가고, 그것이 또한 밝은 미래를 보장해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보다는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변화되는 환경 속에서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식인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단지, 한 가지 더 부가되어야 하는 것은 미래의 방향과 목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런 방향으로 현재에 가장 충실하게 행위를 지속적으로 해나간다면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삶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변화를 고려해서 표현을 해보면, 변화라는 것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라고 인정을 하고,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예측도 하면서 현재의 행위에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미래의 목표, 방향, 변화를 예측하고 현재의 행위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해답이 될 것이다.
끝
20051128 월요일 아침에 원경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