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상법입니다. 나 또한 무아이어서 대근기는 나를 비우는 게 허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근기는 무아가 허해서 일심수행이 되어야 한다. 대근기는 무심으로서 일심을 수행하면 되지만, 하근기는 무언가로서 일심을 수행해야 하는데, 그것이 무심으로 가는 수행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주인공이란 이름이 좋다.
경허스님께서도 주인공이란 이름을 이용했는데, 주인공은 자신의 마음이 육신의 주인고, 그러나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어서 빌空자를 써서, 무아의 이름으로 처음에는 일심으로 주인공!! 하고 모든 것을 주인공이 한다는 것을 관하고, '주인공 만이 나를 잘 이끌어 줄 수 있어'하고, 끊이지 않는 마음이 좋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수행하면 소원을 이룬다던지, 오신통을 체험하게 된다. 그 체험도 주인공이 한 것이니, 내가 한 게 없어야 한다. 내가 한 것이 없이 놓고 가면, 점점 차원이 높아져 대도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염불을 하게 되면, 일심수행은 되는데, 무아로 들어가는 게 안 될 때는 방황하게 된다. 염불독송이나 다라니 수행도 또한 그렇다. 그런 일심수행에서 소원이 이루어진다던지 오신통을 경험하게 되나 운전수가 없다. 무슨 수행이든지 무심으로 인도하는 수행이 아니라면 방황하거나 때로는 병폐가 될 수도 있다.
화두공부도 본래는 화두 아닌 게 없는 것이다. 모든 게 근원 한군데서 나온 것이니 둘로 보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본래 화두 하나가 풀리게 되면, 모든 게 풀리게 되어야 하는데, 요즈음 물질세계에 워낙 견고하게 우리가 집착이 되어서 어려운 것이다. 화두를 너무 집착하지 말고 그것도 자성부처님에 맡겨두면, 자성부처님은 나를 바로 이끌어주는 화두를 주게 된다. 그 화두는 나에게 맞춤형이니 수행하는데 가장 좋다. 이 화두 저 화두 알려고만 하다보면 알음알이만 늘어난다. 일부러 화두 공부를 안 해도 주인공 관하는 수행을 하다보면, 마음 안에서 자성화두가 나온다. 수행 안하는 사람에게도 자성화두가 나오는데, 그게 화두인지를 모르는 분들이 더 많다. 그러니 스승이 필요하다.
무아가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는 잘난 것도 손님이고, 못난 것도 손님이다. 다 비우면 참나가 되는 것인데, 참 주인이 내 몸과 마음을 지키는 것인데, 보통 기도를 할 때, 본래는 비운 마음으로 일체와 한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기도를 하는데, 둘로 나누는 것이 되니 정신분열의 발단이다. 오랫동안 그렇게 기도를 하게 되면, 정신분열이 고착화되는 것이다. 그런 조짐이 아는 소리를 하고, 안정적이지 않는 현상이 보인다. 또 후손으로 내려가면 정신분열이란 현상이 크게 나타나 병원에 의지하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신분열환자를 보면, 조상들이 그렇게 타력기도를 하신 분이 거의 다 있다. 기독교든 불교든 산신시고 하는 분들은 명심해야 한다.
이 도리를 모르면 옛 선지식들의 말만 듣고, 그 본 뜻을 모르고 수행하니, 많이 방황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참 스승의 직접 지도를 받지 아니하면, 대부분 엉뚱한데 집착하면 방황하게 된다. 직접 스승의 지도를 받아도 방황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이니, 스승은 중요하다.
우리 마음에 따라서 우주가 변하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가 우주를 이끌어 가는 것인데, 우리가 세상을 사는 어떤 작은 일에 울분을 참지 못한다든지, 끌려다닌다든지 하며, 마음을 작게 쓴다는 것은 한 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넓은 마음으로 수행하며 살 때 모든 것의 해법이 될 것입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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