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꽤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나 공식적으로는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사자(使者)와 승(僧) 순도(順道)를 파견하면서 불상과 경문을 보낸 데서 비롯되었다. 이는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부견이 외국에 불상을 보냈다는 기록은 『고승전(高僧傳)』에도 있다. 이어 백제 침류왕(枕流王) 1년(384)에 진(晉)나라에서 온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의 예경(禮敬)을 받았다. 신라에는 법흥왕(法興王) 15년(528)에 고구려에서 전해졌다. 그러나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데 대한 설은 많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지기 이전인 미추왕(味鄒王) 2년(263) 설, 눌지왕(訥祗王) 시대에 사문(沙門) 묵호자(墨湖子)가 고구려에서 왔다는 설 등이다. 고구려는 불교가 전해지자 바로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짓고 불교를 공인하였다. 그후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고(393) 반룡사 영탑(盤龍寺靈塔)을 세우기도 하여 불교가 널리 퍼졌고, 광개토대왕 때에는 위(魏)나라 담시(曇始)가 경률(經律) 수십 권을 전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소수림왕의 동생인 고국양왕(故國壤王) 9년(392)에는 <불법을 믿고 복을 구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전한다. 아울러 고구려 불교는 승랑(僧朗)의 공사상(空思想) 연구를 비롯하여 혜관(慧觀)ㆍ혜자(惠慈)ㆍ의연(義淵)ㆍ보덕(普德)등 많은 고승을 배출했다. 백제는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한 이듬해에 한산(漢山 ; 南漢山)에 절을 짓고 10명의 승려를 두어 포교토록 했고, 성왕(聖王) 30년(552)에는 불상ㆍ불경 등을 일본에 전했는데 이것이 일본 불교의 시작이다.
일본에서는 이보다 앞선 성왕 16년(538)으로 보는 설도 있다.
백제 역시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특히 겸익(謙益) 등은 인도에 가서 계율을 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삼국 중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곳은 역시 신라이다. 이차돈(異次頓)의 순교 이후 국교로서 왕의 보호 아래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가르침으로 확정되었으며, 진흥왕(眞興王) 때에는 진골(眞骨) 중에서 출가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더구나 많은 절을 건립하여 그 교세는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진흥왕 26년(565)에는 명관(明觀)이 진(陳)으로부터 경론(經論) 1,700여 권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써 학문적 연구도 활발해졌으며, 수ㆍ당으로 유학하는 승려도 많았다. 그 중 원광(圓光)은 이는 진(陳)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서 출가하여 포교하다가 다시 수(隋)에 유학하기도 했는데, 진평왕(眞平王) 30년(608)에는 수나라에 걸사표(乞師表)를 보내 30만 대군을 얻어 고구려를 치게 했으며,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짓기도 한 학승(學僧)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로 불교는 더욱 융성하여 화엄학(華嚴學)에 원효(元曉)ㆍ의상(義湘) 유식(唯識)에 원측(圓測), 계율(戒律)에 정롱했던 자장(慈藏), 밀교(密敎)를 전한 혜통(惠通) 등, 쟁쟁한 고승(高僧)이 많이 나왔다. 따라서 이들의 저술도 상당하였으며, 이 시대의 신라 불교는 중국 불교에서 완전히 독립한 교학을 수립했다고 할 수 있다.
조금 후대에 이르면 유식에 정통한 대현(大賢), 화엄을 연구한 승전(勝詮) 등의 학승이 있다. 이처럼 한국 불교의 교학은 중국을 능가하는 고도의 사상체계를 확립하고 있었다. 예컨대, 고구려의 혜자는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어 태자의 섭정(攝政)을 도왔고, 백제의 혜총(惠聰) 역시 쇼토쿠 태자의 섭정을 도와, 일본 불교의 기초를 다지는 등 고도의 불교사상을 일본에 전할 만큼 교학이 발전하였다. 더구나 고구려의 혜관, 백제의 관륵(觀勒) 등은 삼론철학(三論哲學)과 같은 고도의 불교사상을 일본에 전했다. 특히 신라 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은 통일신라 때 중국의 선(禪)을 받아들여 구산문(九山門)이라 일컫는 9개의 산문을 개산(開山)하고 크게 선풍(禪風)을 일으킨 점이다. 또 불교문화도 크게 진흥하여 불국사ㆍ석굴암과 같은 걸작을 남겼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왕이 불교를 맹신하여 너무 많은 불사(佛事)를 일으켜 그 폐해가 컸다. 고려도 신라에 못지않은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룩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왕건이 매우 독실한 불교 신도였으므로 역대 왕들이 모두 태조의 뜻을 따랐으며, 특히 두 차례에 걸쳐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했다. 초조(初雕)는 고려 성종(成宗) 10년(991)에 한언공(韓彥恭)이 송(宋)나라에서 가지고 온 개보판(開寶板)을 저본(底本)으로 삼아 현종(顯宗) 때부터 문종(文宗)에 걸쳐 완성했으나 고려 고종(高宗)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고 말았다. 제2차는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까지 16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총 1,511부 6,802권이며 경판(經板)으로는 8만 1,258판이 지금 해인사 장경판고(藏經板庫)에 보존되어 있다. 이렇듯 왕가의 불심이 돈독하여 문종의 아들 의천(義天)과 같은 대학승이 나왔으며 의천문하에는 항상 1,000여명의 학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지눌(知訥) 때까지는 고려 불교의 황금시대였다. 지눌은 화엄과 선에 통달했는데, 그의 저서 『수심결(修心訣)』은 유명하다. 고려 불교는 선 •교(禪敎)가 병존했으나 특히 선종 쪽에 많은 고승이 있었다. 지눌 문하의 승형(承逈)ㆍ혜심(慧諶) 등이 그 대표라 할 수 있다. 원종(元宗, 재위 1259~1274) 때 원(元)나라의 속국이 되면서 국력이 쇠퇴하자 불교도 차츰 그 빛을 잃게 되었고, 때마침 수입된 주자학(朱子學)의 영향으로 배불(排佛)의 기운이 돌기 시작하였다.
고려에 이어 건국된 조선 왕조에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불교가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태조ㆍ세종(世宗)ㆍ세조(世祖) 등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보호하고, 호국불교(護國佛敎)에 힘쓰기도 하였다. 특히 세종은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등을 저술케 하기도 했으며, 많은 경전의 언해본(諺解本)을 간행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많은 고승이 나왔다. 무학(無學)을 비롯하여 함허(涵虛)ㆍ보우(普雨)ㆍ서산(西山)ㆍ사명(四溟) 등이 대표적인 고승이다. 임진왜란 때는 승군(僧軍)이 크게 활약하여 호국불교의 진면목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국권 침탈기에는 총독부의 이른바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31개 본사(本寺)와 1,200여 말사(末寺)가 일제의 관권하에 있었다. 그러나 만해(卍海)ㆍ용성(龍城) 등 일제에 항거한 애국적인 승려도 있었다. 8ㆍ15 광복으로 국권이 회복되자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일제의 잔재를 일소하는 한편, 가장 오래된 법맥을 이은 조계종을 중심으로 여러 종파가 체제를 정비하게 되었다. 제1공화국 때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계 정화 지시에 따라 비구승(比丘僧)과 대처승(帶妻僧)간의 이전투구(泥田鬪狗)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1962년 불교재산관리법(佛敎財産管理法)이 발효되자, 조계종은 교구제를 재정비하여 지방에 25개 교구본사(敎區本寺)를 두고, 중앙에는 총무원ㆍ중앙종회(中央宗會)ㆍ감찰원(藍察院)ㆍ포교원(布敎院)을 두어 현대적 불교의 포교와 역경(譯經), 인재양성에 힘쓰고 있다.
한편, 불교 재단에서 설립한 종립학교(宗立學校)가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조계종 종립학교인 동국대학교가 있고 그 밖에 초등학교, 중ㆍ고등학교도 상당수가 있다. 또 90년 5월 1일 개국된 불교방송(BBS)은 <깨침의 소리, 나누는 기쁨>을 방송지침으로 삼아 전파를 통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인도
부파불교
불교의 교단은 석가 입멸 후 100년 정도는 통일을 유지했는데, 그후 보수적인 상층부와 진보적 개혁파 대중사이에서 대립이 생겨서 분열하고, 각각 상좌부와 대중부가 되었다. 그 원인에 대해서, 북전불교에서는 수행 완성자의 존재방식을 둘러싼 견해의 상위로 보고, 남전불교에서는 소금이나 금전의 보유 등을 둘러싼 계율조항의 싸움으로 돌렸다. 분열은 그후 더욱 양 부파 내부에 미치고, 이후 200~300년 사이에 18의 부파로 나누어지고 근본 2부와 합쳐서 20부파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분열의 연대에 대해서는 기준이 되는 석가의 연대에 이론이 많기 때문에 확정할 수 없다. 그러나 교단의 분열은 불교 발전의 결과로 생각하면,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 치하의 마우리아조 시대가 그에 적합하다. 가령 스리랑카의 상좌부는 아소카의 왕자 마힌다에 의한 전도로 전해지는데, 그 근거지는 서인도의 교단이었다고 생각된다(단, 아소카의 비문에는 분열을 계율하는 기사는 있지만 부파명 등은 전혀 들고 있지 않다).
불교사에서는 상좌, 대중 2부로의 근본분열 이후를 부파불교 시대라고 하며 또한 부파마다 교리의 연구(아비다르마)를 다투었기 때문에 아비다르마 불교라고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 분열 이전을 초기 불교 또는 원시불교라고 한다. 주된 부파로서는 상좌부 계통으로 북인도에서 세력을 뻗쳤던 설일체유부(약칭 유부), 화지부, 법장부 등, 서인도에 세력을 가진 속자부 등이 있으며, 유부에서 다시 경량부가 분출했다. 속자부에서도 정량부 등이 분출했는데, 정량부는 후세(현장이 체재한 7세기경) 중인도에 진출해서 큰 세력을 가졌다. 그 외에 설산부가 있으며, 근본 상자부를 자칭하고 있다. 대중부도 또한 많은 부파로 나뉘어졌는데, 북인도에 있었던 설출세부는 불전 『대사(마하바스투)』를 남기고 있다. 남인도는 대중부계가 많은데, 지역적으로 안드라파라고 하기도 한다.
스리랑카로 건너간 상좌부는 분별설부라고도 하는데, 팔리어에 의한 성전을 완비해서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유부(有部) 또한 한역 등에 많은 자료를 남겨서 그 교의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외의 부파는 유부나 스리랑카의 상좌부의 전승에서 알려진 것 이외에는 별로 많은 자료는 없다. 유부는 또한 대승불교에서 부파불교의 대표로 보아서 비판의 화살을 받았는데, 사실, 북인도에서 가장 유력한 부파였다. 유부는 기원후 2세기에 쿠샨 왕조의 왕 카니시카하에서 확장되었으며 그 학설은 『대비바사론』에 집대성되었다. 한편 유부라는 이름은 3세에 걸쳐서 일체법이 실유하다는 학설에 의거하는데, 『대비바사론』을 소의로 하는 점에서 비바사사(畏婆沙師)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 경전을 소의로 하는 것을 주장한 것이 경량부로, 이 파는 현재의 법만을 실유한다고 보았다. 5세기에 나온 바스반두(세친)의 『아비달마구사론』은 유부학설의 강요서인데, 그 입장은 경량부에 따르고 있다. 속자부의 계통에서는 신심을 구성하는 오온과 어중간하게 존재하는 자아의 존재를 인정, 그 때문에 타파에서 불설위반으로 보았다. 대중부의 계통은 불타를 초월적 존재로 보는 점에 특색이 있는데, 이와 대승불교와의 관계는 정해져 있지 않다.
중국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기원 전후의 일이다. 전한의 무제가 대원의 천마를 동경해서 서방의 경략에 임한 후에, 동서문명의 교류는 갑자기 번성하였고 소위 실크로드를 개통하자 불교의 동진은 표리의 관계에 있었는데 중국민족에게 서방은 항상 신비의 보고였으며 불교에 대한 대응은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법과 승의 세 가지를 사람들은 3보(寶)라고 한다.
중국으로의전래
중국에서의 최초의 번역불전이라고 하는 『사십이장경』의 서론은 전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느 날 밤, 후한의 명제가 서방에서 전정으로 날아오는 이상한 금인의 꿈을 꾼다. 금인은 머리 뒤에 빛을 지고 전신에서 광명을 내뿜는다. 신하 중 지혜로운 자가 서방인도의 불일 것이라고 하자, 제는 곧바로 사자를 파견하였고 2명의 인도승이 대월씨에서 낙양에 맞이되며, 『사십이장경』을 번역하였다. 인도승은 불상을 장래하고, 소향예배의 의식을 전하였다. 또한 제(帝)는 각지에 절을 세우는 것 외에 낙양 교외에 자신의 수릉을 만들고, 천승만기의 의장이 불탑을 둘러싸고 강림하는 서역풍의 벽화를 그리게 하였다.
동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불교는 기록이나 종교적 유적ㆍ유물에 의해서 알려진 역사적 불교와 오늘날 신봉되고 있는 현대불교로 나뉘어진다. 보로부두르 등의 유적을 남긴 자바의 샤이렌드라 왕조의 밀교계 대승불교는 전자의 대표적인 예이다. 자바불교는 후에 시바교(힌두교 시바파)와 혼교해서 자만 부드라고 하는 독특한 형태의 불교를 낳고, 마쟌파이트 왕조하에서 번영했는데, 이슬람이 지배층에 침투함에 따라서 쇠미하고 15세기 이후 소멸했다. 수마트라섬에서는 7세기 말에 이 지역을 거쳐서 인도로 간 의정이 스리비자야에서의 불교의 융성을 지적하고, 인도에 가서 불법수행을 하고자 하는 당나라 승려에게 준비를 위해서 이 나라에 체재할 것을 권했는데 수마트라섬의 불교는 14세기 후반까지 비문에 의해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나, 이슬람의 도래와 함께 멸망했다. 대륙부에서는 먼저 1~2세기부터 7세기경가지 인도차이나반도 남동부에 있었던 부남(扶南)에서 불교가 행하여졌다고 알려져 있다. 6세기 흥한 진랍에서는 비문에서 대승불교의 홍통(弘通)이 확인되며 9세기 초에 성립한 앙코르 제국에서는 힌두교와 함께 대승불교가 행하여지고, 바이욘 등의 훌륭한 불교유적을 남겼다. 반도 서부의 미얀마(버마)에서는 3세기경부터 9세기에 걸쳐서 번성한 퓨족의 나라 슈리크세트라에서 상좌부와 산스크리트 성전을 신봉하는 근본 설일체유부계의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함께 행하여졌다. 불교는 5세기 이후 타톤 등의 연해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몬족의 여러 국가에서도 성행하였다. 이들 각지의 불교는 모두 후에 쇠망했기 때문에 오늘날 그 전통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대 불교는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남부, 인도네시아의 일부에 보이는 스리랑카계의 상좌부 불교가 중심인데, 이 외에 베트남, 싱가포르 및 동남아시아 각국에 사는 화교에게 신봉되어서 애송용으로 한문경전을 이용하는 중국계 대승불교도 있었다. 단, 후자에 대해서는 독립의 종교인 동시에 유교, 도교와 함께 중국적인 <3교>를 구성하는 시점을 가지는 것이 요청된다.
국가, 사회에서의 불교
국민 속에 차지하는 상좌부 불교도는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국왕을 불교의 수호자로 하는 전통을 잃지 않고 오늘날까지 독립을 유지한 태국을 제외하면, 제2차 대전 후 독립한 이들 여러 나라의 불교는 헌법에 의해서 국교(캄보디아, 라오스)나 국교에 준한 지위(미얀마)가 보장되었다. 이중 미얀마에서는 1961년의 헌법재정에 의해서 불교를 국교로 정했지만, 그 조치가 비불교도의 반발을 사서 정치적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런 경험에서 사회주의 공화국이 된 이후의 미얀마 정부는 정교분리정책을 견지하고, 불교의 정치화를 극도로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출가자의 교단인 상가를 중핵으로 하는 상좌부 불교는 근대화에 따른 도시화의 급속한 진행과 함께 발생한 민중의 가치의식의 변용에 새로운 대응이 요구되고 있다. 이런 경험은 동남아시아의 상좌부 불교제국 중 근대화의 진전이 빠른 태국에서 가장 현저하다. 주로 지식인 불교도층을 대상으로 하는 명상 중시의 종교운동, 매스 미디어를 이용해서 대중에게 평이한 말로 불교의 덕목을 주장하는 개인승의 출현, 사원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의 근대적 부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원에서의 직업교육의 실시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불교 [佛敎] (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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