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

소승과 대승의 차이

圓鏡 2014. 6. 13. 21:51

 

유마경을 중심으로 본 소승과 대승의 차이점


 승은 중생을 태우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을 비유한 말이다.

 

 소승은 자신의 구제에만 전념하고 타인의 구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으며 성문.벽지불이 소승의 대표적인 것이다. 성문은 사제(고.집.멸.도)의 법을 닦아 아라한(번뇌를 끊은 사람)이 된 것이며 벽지불은 연각이라고도 하며 12인연법을 관함으로 번뇌를 모조리 끊고 열반을 얻는 성자를 말한다. 소승은 출가하여 계율을 수행하지 않으면 해탈할 수 없다는 편협한 가르침이며 아라한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소승에서 말하는 보살이란 부처의 전생만을 가리키며 계.정.혜 삼학만을 중시하여 대승의 육바라밀과 대비되기도 한다. 소승은 인류전체가 완전을 향해 생장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만이 생사를 초월할 수 있다면 족하다는 마음으로 정진하는 사람이다.

 

 대승은 타인을 위한 활동이 바로 자기를 위한 수행의 완성이 된다는 교리를 위주로 하고 있으며 재가와 출가를 일관하는 불교이다. 또 대승불교는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또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두를 구제하려는 폭넓은 입장의 불교이며 대승의 대표는 보살사상이다. 보살은 육바라밀(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수행으로 널리 중생을 구제하려는 사람이며 ‘공’ 은 대승교리가 갖는 특색중의 하나로 ‘법은 공이며 무자성이다’고 설한다.

 

이상은 개략적으로 소승과 대승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대표적인 대승경전인 유마경의 사상이 너무 방대함으로 성문으로 대표되는 제자들이 유마거사에게 질채당하는 제자품을 중심으로 대승과 소승의 차이점을 알아보고자 한다.

 

 사리불은 조용한 곳에 앉아서 잡념을 떨쳐버리고 고요히 마음을 어떤 한 대상에 집중하여 사유를 깊게 하는 것이 좌선이며, 일체의 번뇌가 끊어져서마음이나 마음의 작용조차 없어지는 것이 열반에 들어 갈 수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나 유마힐은 번뇌를 지닌 채로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열반이라 해도 번뇌를 떠나 있지 않다. 열반은 번뇌가 있으니까 비로소 열반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번뇌를 지닌 채 열반을 얻는 것이 좌선 본래의 모습이라 한다.

 

유마힐은 목련에게 법을 법대로 설교해야 한다고 한다. 그 법이란 무엇인가? 법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주체적인 실재를 생각하지만 법에는 그런 것이 없다. 법에는 그것을 특징짓는 모습이 없으며, 모습으로 포착할 것도 없다. 말로써 표현되지 않으니까 명칭이 없고, 형태도 없으면 마음에 떠오를 것도 없다. 법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같으며, 오는 일도 가는 일도 없으며, 좋고 추한 것도 없으며, 증감도 생멸도 없다. 중생의 날카롭고 둔한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자유로이 적응하여 대자비로써 대승의 가르침을 찬미하고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함을 마음에 새기는 한편 불.법.승 삼보를 존중해서 법을 설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가섭에게는 걸식이 단순히 자기 혼자를 위한 수행 방법에 그친다면 그 참뜻이 아니며 그를 통하여 자타가 함께 평등. 진실할 수 있는 법이 실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이렇게 하여 먹을 경우 식욕을 채우려고 먹는 것도 아니요, 식욕을 떠나서 먹는 것도 아니며, 고요한 무심의 경지에서 먹는 것도 아니요, 무심의 경지를 나와서 먹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자기 중심인 소승의 성자와 길을 달리하는 보살의 모습이 인정되는 것이지만 다시 보시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보시의 공덕의 대소를 생각하는 따위의 집착심을 버리게 하는 것으로,그때에는 보시된 음식도 헛된 것이 안되는 것이다.

 

수보리는 유마힐로 부터 언어 또한 환상처럼 공한 것이라 듣고, 마침내 자기의 공에 대한 이해가 표면적인 천박한 것이며 진짜가 아니었다는 저을 알았다. 일체의 존재는 환상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해탈이며, 이 해탈의 모습이 곧 일체의 존재 그것이다. 공은 고정했을 때는 그것이 공이 아니며 유로서의 공이 된것이다. 공도 또한 공하다 하여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다.따라서 공은 움직여 가는 그 움직임을 통해 진실한 깨달음을 계속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바리에게는 계율에 대하여 제법은 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물위에 뜬 달과 같고 거울 속의 사람모양 같아서 다 망상으로 생긴것이다. 이렇게 알게 되는 것이 율을 받드는 일이라 하여 마음작용을 강조했다.소승의 계율에서 마음의 문제를 제쳐 놓고 다만 형식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으므로 마음에 초점을 맞춘것이다. 이로부터 이른바 대승의 계율이 생기게 되었다.

 

라후라에겐 출가의 공덕에 대해 그런 것은 처음부터 없다고 주장하였다. 깨달음의 경지를 출가로써 얻어지는 공덕이라고 보는 소승적인 사고 방식에 대한 부정이었다. 깨달음은 출가자에게만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 가정 생활을 하고 있는 일반인에게도 출가자와 똑같은 깨달음이 없어 서는 안된다.라고 하여 소승의 출가중심의 불교를 넘어서 대승의 보살행으로 향하고 있다.

 

이상 간략하게 제자품을 중심으로 소승과 대승을 살펴보았는데 대승의 특색인 보살사상을 유마경에 나타난 정토사상을 중심으로 알아보고 마무리를 하려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뭇 중생의 종류가 바로 보살의 불국토이다.  정직한 마음이 보살의 정토이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대승의 가르침을 받은 중생이 태어난다. 보시를 즐겨하는 것이 보살의 정토이다. 계를 지키는 것이 보살의 정토이다. 인욕이 바로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서른 두 가지의 뛰어난 신체적 특징으로 장엄한 중생이 태어난다. 정진이 곧 보살의 정토이다. 선정이 곧 보살의 정토이다. 모든 것에게 도움을 베풀고자 하는 영원한 네가지 마음(사무량심-자.비.희.사)이 바로 보살의 정토이다. 깨달음으로 이끄는 네가지 방편(사섭법)이 바로 보살의 정토이다.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한 서른세 가지 수행방법(삼십칠도품)이 곧 보살의 정토이다. 모든 공덕을 남에게 돌려주는 마음이 곧 보살의 정토이다. 깨달음을 장애하는 여덟가지 어려움을 없애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로 보살의 정토이다. 스스로 계행을 굳게 지키면서도 남의 허물을 헐뜯지 않는 것이 바로 보살의 정토이다.십선이 곧 보살의 정토이다. 만약 보살의 정토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밝혀야 한다.”

 

퍼온 글, 원문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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