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아의 3대 왕이었으며, 2대 왕 빈두사라왕의 자식 101명 중 한 명이었다. 친동생 한 명을 뺀 이복 동생 99명을 모두 죽이고, 그들을 따르던 신하와 궁녀까지 모두 죽인 뒤 왕위에 올랐다.( 이 왕자들 중에서도 중심적인 인물이 아니어서, 오늘날 보팔 산치라는 변방에서 나라를 통치하였다. 거기서 맺은 한 여인과의 인연으로 아들을 낳고, 그 여인의 무덤을 조성한 것이 산치대탑이다. 그 아들은 스리랑카로 불교를 전하는 포교임무를 받았다. 오늘날 남방불교의 시작 지점이 산치지역이다. )
그리고 전쟁에 대한 참회와 반성의 의미로 불교에 귀의하여 불탑을 세우고 승려들을 스리랑카 등 이웃 나라로 보내 불교 선교화(남방불교의 효시)에도 힘을 썼다. 아소카 왕의 치세는 대다수의 주변국들이 불교를 믿기 시작하는 시기와 겹치니,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불교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불교만을 강요하지 않고, 다양한 종교를 관대하게 인정했다. 재미있는 것은 마우리아의 1대 왕이자 자신의 할아버지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자이나교를 믿었으며, 2대 왕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빈두사라는 힌두교를 믿었다. 그리고 본인은 불교에 귀의하였다.
백성들 생활개선에도 큰 힘을 쏟아 우물을 파서 물이 부족한 지역을 돕게 했으며, 흉년에 대비하여 곡식을 저장하고 싼 이자로 빈민들의 경제적 뒷받침을 하도록 하여 인도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왕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아소카의 비폭력, 비전쟁 정책에 대하여 아들들이나 국내에서도 불만도 많았고 결국 아소카가 죽은 뒤로 이런 비폭력, 비전쟁 법률은 흐지부지되어 사라졌다.
아소카 왕은 재임 당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이 막강한 힘을 남아시아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그의 마지막 전투인 칼링가 전투 직전까지 활발한 영토 확장을 펼친 끝에 기원전 265년에 이르러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별다른 기록이 남지 않은 마우리아 왕조 최대강역을 확인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아소카왕이 전국에 세운 비문인 아소카 칙령 덕이다. 비문의 분포도가 정확히 마우리아 왕조의 강역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비문 꼭대기에 장식된 돌사자 조각은 오늘날 인도의 국장이며, 함께 새겨둔는 수레바퀴 문양은 현대 인도 공화국 국기의 한가운데에도 자리잡았다.
아소카 왕(Ashoka the Great) | ||
별칭 | 아육왕(阿育王) / 한역 명칭 | |
아소카(Ashoka) | ||
빈두사라왕(頻頭娑羅王) | ||
생몰년도 | 기원전 273(?) ~ 기원전 232년 | |
재위기간 | 기원전 265년경~238 또는 기원전 273경~232 |
'불교용어해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통( 苦 )의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0) | 2019.03.07 |
---|---|
윤회 - 상속설 (0) | 2019.03.06 |
여래 십대명호의 뜻 (0) | 2019.01.07 |
법당의 불보살과 협시보살 관계 (0) | 2018.09.11 |
대웅전과 대웅보전의 불보살 (0) | 2018.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