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해설

일체개고 = (현상계에서는) 왜 고통스러운가?

圓鏡 2016. 3. 18. 11:51

불교에서 말하는 苦(고통), 一切皆苦란? 사전적인 의미로써는

    • "사람이 無常함과 無我를 깨닫지 못하고 永生에 집착하여 온갖 고통에 빠져 있음을 이르는 말."

    • 현상( 現象 )세계의 모든 것은 다 변한다. 그런데 변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 그러나 현상계 밖의 개념(concept).관념은 변하지 않는다 ( 고정관념 등 )

    • (ex) "진리"라는 용어, 1+1=2, 책상, 의자 등은 개념으로써 이름 붙여진 것의 그 이름은 그대로 있다.

    • (ex) 내 팔을 내가 꼬집었을 때, 실제로 아픈 통증은 현상이다. 그러나 아프다는 말(표현)은 개념.관념이다.


< 괴로움 어디서 오는가? 에서 발췌 - 정준영 교수 글 >


초기불교 안에서 둑카는 존재의 전반적인 속성을 의미하는 삼법인[무상(無常, anicca), (, dukkha), 무아(anatta, 無我)]의 특징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둑카에 대한 잘못된 번역이 불교에 대한 오해로 이끌기도 한다. 특히 일체개고(一切皆苦, sabbe saṅkhāra dukkha)’의 둑카를 단순히 ’, ‘suffering’, ‘괴로움등으로 번역하여 모든 것이 괴롭다라고 설명한다면 이는 둑카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많은 사람들이 둑카의 의미를 잘못 번역하여 사용함으로 인해 불교를 염세주의라고 오해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염세주의적인 사상으로 잘못 이해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한정되고 안이한 번역과 피상적인 해석 때문이다. …… 빠알리어 둑카를 일반적으로 괴로움, 아픔, 슬픔, 불행의 의미로   행복, 편암함, 즐거움을 나타내는 수카(sukha)의 반대어로 사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성제의 둑카는 붓다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과 삶의 다양하고 깊고 거대한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사성제의 둑카 역시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괴로움을 나타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의 둑카는 불완전성’, ‘무상함’, ‘비어 있음’, ‘실체 없음등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때문에 사성제의 둑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를 찾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둑카를 괴로움이나 고통 등의 부적절하거나 잘못된 단어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번역하지 않고 둑카로 놔두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붓다가 괴로움을 설명하지만 삶의 행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붓다는 재가와 출가에 대한 구분 없이 여러 가지 형태의 육체적정신적 즐거움에 대하여 설한다. 하지만 초기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재가의 즐거움, 출가의 즐거움, 애착의 즐거움, 정신적인 즐거움, 육체적인 즐거움 모두 둑카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수행을 통해 얻는 선정(jhāna)의 상태, 높은 수행의 단계 역시 둑카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둑카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괴로움이 아니라,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둑카는 단순히 육체적정신적 느낌뿐만 아니라, 철학적 의미로도 사용된다. 위제세케라(Wijesekera)는 이러한 특징을 지닌 둑카를 불만족성(unsatisfactoriness)’이라고 소개한다. 개체를 이루는 그 모든 것은 무상한 성질 때문에 덧없으며, 비지속적이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경험의 근거가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무상한 것은 무엇이건 무상하기 때문에 불만족스럽다. 그는 불교에서 사물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을 소개한다.


불교에서 사물을 보는 데는 낮은 관점과 높은 관점 두 가지가 있다. 괴로움을 관찰함에 있어서도 물론 이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낮은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경험세계, 즉 감각과 느낌의 영역에는 즐겁거나 행복한 느낌, 불쾌하거나 불행한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다. …… 세상에는 불행과 마찬가지로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가지 느낌을 더 깊이 검토해 보면, 이 세 가지 유형의 경험들 사이에는 반드시 공통분모가 있다. 즉 이 세 종류의 경험이 모두 무상 혹은 변천이라는 보편적인 속성에 종속된다는 사실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붓다가 설한 사성제와 일체개고의 둑카는 (괴로운) 느낌의 차원을 초월한다. 심지어 즐거움이나 행복도 그것이 무상한 것이라면 불만족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기에 둑카라는 것이다. 니다나 상윳따(Nidana saṃyutta)는 붓다와 사리뿟따의 대화를 통해 모든 느낌이 둑카라고 설한다.


벗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즐거운 느낌과 괴로움 느낌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다. 벗이여, 이 세 가지 느낌은 무상하며,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알려질 때 느낌 가운데 환락이 일어나지 않는다. …… 싸리뿟따여, 훌륭하다. 싸리뿟따여, 훌륭하다. 그 법문은 이와 같이 무엇이든 느껴진 것은 괴로움에 속한다라고 간략하게 설할 수 있다.”


이처럼 느낌을 통한 괴로움은 즐거움과 대비되는 낮은 세속적 관점의 괴로움을 말한다. 하지만 붓다가 삼법인을 통해 설하고자 했던 괴로움은 느낌의 범주뿐만 아니라, 모든 현상은 무상함 안에서 불만족스럽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상


일체개고 = 모든 것은 고통이다. 이 때 모든 것은 현상을 의미한다. 개념(concept)는 아니다. 내가 내 손 등의 피부를 꼬집었을 때, 내가 아프다는 것을 느끼는 현상을 실재(reality)라고 한다면, “아프다라고 하는 말과 글은 현상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개념이다. 내가 꼬집는 행위를 멈추면 아픔은 사라진다. 즉 인(손등)과 연(꼬집음)이 만나 아픔이라는 ()과를 만들었다가 꼬집는 행위를 멈추게 되면 아픔도 사라진다. 여기에서 고통이란 변화에서 초래되는 결과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변한다. 그런데 그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고통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도 변하고 즐거움도 변하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만족스러운 방향으로 변하고 있어서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개고라는 말은 진리(이것도 하나의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