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종단

조계종의 재건 ( 1962년 4월 11일 통합종단 )

圓鏡 2015. 10. 18. 18:16

 

조계종의 재건과 한국불교 대표종단 시대(1941~현재)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였다. 이제 한국불교계도 새로운 시대를 맞았으나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38선을 긋고 남북을 분단시켰다. 이에 한국은 친미와 친소, 좌-우 대립의 극단을 치달았다.
 
 
한국불교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계종을 재건하여 운영한 한암 종정과 지암 종무총장 등 교단 지도부는 광복이 되자 새 시대는 새 인물에 맡겨야 한다며 자진해서 사퇴하였다. 교단을 인수한 지도부는 주로 대처승들이었다. 대처승 지도부는 교단의 개혁보다는 기득권 유지에 안주하였다. 이에 청년 불자들과 선학원의 선승들이 반발하여 불교계 안에서도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복 직후 한국불교의 혁신을 도모한 스님들이 있었으니 바로 1947년 봉암사 결사를 추진한 청담, 성철, 자운스님 등이다. 이분들은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광복 이후 불교계의 쇄신책을 모색하였다. 그 방법은 오로지 부처님 법대로 사는 도량을 만들어 살아 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물색한 도량이 구산선문 전통의 문경 희양산 봉암사였다. 1947년 성철, 자운, 보문, 우봉스님은 봉암사로 들어가 결사를 시작했다. 곧 이어 청담스님이 합류하였다. 그 뒤로 향곡, 월산, 혜암, 법전, 성수, 종수, 지관 스님 등 20여 명으로 늘었고, 비구니 묘엄, 묘찬, 지영, 재영스님 등은 백련암에서 참여했다.
 
 
결사(結社)는 불교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자는 종교운동이다. 일찍이 중국에 백련결사가 있었고, 고려시대 보조국사의 정혜결사, 요세스님의 백련결사, 근세의 1899년 경허선사의 해인사 수선결사 등이 있었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성철, 청담, 자운 스님 등은 오로지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정신으로 ‘공주(共住)규약’을 정하고 이를 따라 실천하는 스님들만 방부를 받아 같이 정진하였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혼란기에 오로지 불교 정신으로 살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던 결사는 1950년 전쟁의 발발로 중단하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승단정화운동 이후 1962년 출범한 대한불교조계종 시대가 열리자 이 결사에 참가했던 스님 중에 청담, 성철, 혜암, 법전 스님은 종정이 되었고, 월산, 자운, 지관스님 등은 총무원장이 되어 종단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거나 행정을 총괄하는 소임자가 되었다. 또한, 지금 조계종 스님들의 가사와 장삼도 봉암사 결사에서 의제를 정한 것이 근거가 되었고, 화두 참선을 중심으로 간화 수행 종풍, 보살계 수계식 등도 결사의 정신이 반영된 전통이다.
 
 
이외에도 백양사에는 태고 – 서산 법맥의 환성지안스님에서 연담유일스님으로 내려온 법맥을 이은 만암스님이 고불총림을 만들고 선풍 진작을 도모하였다. 통도사에는 역시 태고국사에서 환성지안스님으로 이어진 법맥에서 성해스님 문하에 구하ㆍ경봉 스님이 나와 선풍을 진작하였다. 송광사에는 역시 환성지안에서 석두스님 문하에 효봉스님이 수행가풍을 이었다. 근대 강맥으로는 태고 – 서산 – 백파스님으로 이어진 법맥에서 내장사 한영스님이 나와 광복 직후 조선불교의 초대 교정으로 추대되었다. 또 다른 근대 강맥으로 백파에서 경송 문하에 봉선사 운허스님이 나와 큰 역할을 하였다. 운허스님은 오랫동안 강원에서 강사로 후학을 가르쳤고, 광복 직후에는 사찰 재산을 모아 광동학원을 세워 인재양성과 동국역경원을 세워 역경불사에 정진하였다.
 
 
1950년에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사찰에도 큰 영향을 주어 선원의 유지를 위협하였다. 더구나 1949년 농지개혁법이 시행되어 사찰의 토지가 헐값에 몰수되자 경제적 곤란은 가중되었다. 특히 당시 사찰을 운영하던 대처승들은 토지가 몰수 되고 대가로 받은 보상금을 처자식들의 살림살이에 우선 사용하고 선원에는 양식을 대주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선승들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님과 승가에 올리는 공양물을 대처승 가족의 생계에 사용하는 것은 부처님 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나갈 무렵 1953년 교단 지도부는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불국사에서 회의를 열어 전국 주요 사찰 중에서 18곳을 선승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량을 넘겨주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그 도량의 대처승들이 크게 반발하여 이 결의는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비구선승들은 불만이 높아갔고 급기야 1954년 선학원에 모여 정화결의대회를 열고 ‘불법에는 대처 없다‘는 대의명분으로 사찰에서 대처승들을 내보내는 정화운동을 본격 추진하였다. 당시 교단에 승적을 가진 1만여 승려들의 절대 다수는 대처승들이었다. 그중 독신 비구승들은 대부분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들이었는데, 인원은 1천여 명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비구 선승들은 오로지 부처님 법에 맞게 교단이 운영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정화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소수의 비구승들의 강력한 정화운동은 정부당국과 언론, 그리고 국민의 지지를 받아 마침내 1960년에 이르면 전국 주요 사찰은 비구승들이 운영권을 확보하게 되어 사실상 교단 정화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불교계의 비구-대처 갈등이 완전히 종식되기를 바라는 사회 각계의 여론과 비구-대처 양 지도부의 합의로 통합 논의가 추진되어 마침내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게 되니 이것이 1962년 4월 11일이다. 지금 대한불교조계종의 출발점은 이때로 볼 수 있으나 한국불교 1700년 역사와 전통을 모두 계승하고 아우르는 통합 종단, 대표 종단의 위상으로 출발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새롭게 출발한 대한불교조계종은 종단의 재정비와 현대화를 추진하여 20세기에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3대 지표를 천명하고 추진하였다. 3대 지표는 도제양성, 역경, 포교였다. 이를 위해 역경원을 설립하여 팔만대장경의 완역을 추진하였다. 도제양성을 위해 전국 주요 사찰에 총림을 설치하여 선원과 강원, 율원을 세워 삼학의 균형 잡힌 인재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1980년대에 총무원 산하에 포교원을 설치하여 포교에 전담하도록 하였다.
 
 
한편, 종단은 전국 주요 명승지에 자리하여 수많은 국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바 국가의 여러 관리를 받게 되었다. 특히 1962년 정부는 불교관리재산법을 만들어 일제강점기 사찰령의 주요 규제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1969년 정부가 국립공원제도를 시행하면서 가야산 해인사와 지리산 화엄사 등 종단 사찰의 재산을 아무런 협의나 보상 없이 국립공원 주요 부지로 지정하였다. 당시 해인사 방장 성철스님은 ‘사찰은 신성한 수도도량으로 국민관광지화 되면 국민정신이 황폐화될 것이라 개탄’하는 등 종단은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시행하였다.
 
 
1980년에 들어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뒤 10월 27일 새벽에 전국 3천여 사찰에 계엄군이 진입하여 강압적인 수색을 하고 총무원장을 비롯한 주요 사찰 소임자 스님들을 불법 구금하는 10.27법난이 일어났다.
 
 
1986년에는 해인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열리어 참석한 2천여 스님들이 ‘불교자주화선언’을 하고 ‘10ㆍ27진상규명’과 ‘불교재산관리법 철폐’를 정부에 요구하였다. 이에 정부당국에서도 종단의 요구를 수용하여 “전통사찰보존법”으로 전면 개정하게 되었다.
 
 
1994년에는 당시 총무원장 의현스님이 3선 연임을 강행하자 대중의 반발이 일어나 종정과 총무원장이 같이 퇴진하고 종단제도개혁이 추진되었다. 종헌과 종법이 대대적으로 개정되어 총무원장 선출을 선거인단의 간선제로 하고, 교육과 포교를 전담하기 위해 교육원과 포교원을 별원으로 두어 3원 체제로 변화하게 되었다. 또한, 지방자치시대에 발맞춰 교구자치제도를 도입하여 교구장을 직선제로 선출하게 바꿨다. 이후 종단은 제도개선의 기반 위에 각 부분별 영역을 전문화시켜 나갔다. 사회복지의 요구가 높아감에 따라 전담할 조직으로 사회복지재단을 법인으로 신설하고, 청소년단체로 파라미타청소년협의회를 조직하였으며 조계종출판사를 신설하여 출판사업을 확대하였다.
 
 
2000년대 접어들어 종단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을 건립하여 불교중앙박물관과 중앙종무기관이 한 곳에 입주하였다. 또한 불교문화재연구소를 설립하여 불교문화재의 발굴과 보존을 전문화시키고, 템플스테이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조계사 일대의 정비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전법회관을 건립하였고, 공주에 한국문화연수원을 건립하여 중앙연수 시설을 갖추었다. 또한, 공익법인 아름다운 동행을 만들어 국내외에 자비행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2014년 현재, 제34대 종단 집행부가 출범하여 ‘자성과 쇄신 결사’를 통해 종단 내부의 쇄신과 종단의 사회적 역할 확대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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