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불교
(1) 진흥왕대의 불교
신라의 불교는 법흥왕에 의해서 크게 발전하는 길이 개척되었으나, 불교를 진흥시켜 불교국가로 손색없는 기반을 닦아놓은 것은 진흥왕에 힘입은 바 컸다.
554년(진흥왕 15) 흥륜사의 낙성과 더불어 왕은 국민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국법으로 허락하였다. 549년에는 양나라로 유학갔던 각덕(覺德)이 최초로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550년에는 불교의 제반 업무를 관장하는 행정기구인 대서성(大書省)과 소년서성(少年書省)을 설치하였다. 이듬해에는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 승려 혜량을 승통(僧統)으로 삼고 그 밑에 비구승을 관장하는 대도유나(大都唯那)와 비구니승을 관장하는 도유나랑(都唯那娘)을 두게 함으로써 교단을 지도, 육성하게 하고 통솔을 용이하게 하는 체제를 확립하였다.
565년(진흥왕 26)에는 진나라의 문제(文帝)가 승려 유사(劉思)를 신라의 유학승 명관(明觀)과 동행하게 하여 불교 경론 2,700여 권을 전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불교계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한 일이다.
나날이 늘어가는 한역(漢譯)된 불교경전 중 중요한 문헌들이 곧 신라인들의 불교 이해를 돕게 된 것이며, 이때부터 신라에서는 본격적인 불교연구의 기틀이 잡히게 되었다. 당시 한반도 전체 불교계를 위해 유사와 명관의 기여는 대단히 막중한 것이었다.
또한 567년에는 14년의 공사 끝에 최대의 사찰이었던 황룡사(皇龍寺)를 비롯하여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의 두 절을 세웠고, 574년에는 이 황룡사에 장륙(丈六)의 불상을 안치하였다.
이 장륙불은 금동불상으로 3만5007근의 구리와 1만198푼의 금이 들었으며, 좌우의 두 보살은 철 1만2000근과 금 1만130푼이 들었다고 한다.
572년(진흥왕 33) 10월에는 팔관지법(八關之法)과 인왕백고좌회(仁王百高座會)를 열어 신라 최초의 불교 호국도량(護國道場)을 개설하였다. 승통 혜량의 지도 아래 7일 동안 베풀어진 팔관지법은 이때 전몰장병의 위령제로 시작되었으나, 뒤에 민족의 축제인 팔관재(八關齋)로 바뀌게 되었다.
또 백고좌회는 원래 100명의 고승을 모아 불경을 강(講)하는 모임이다. 이때에 설법을 할 만한 100명의 고승이 이미 나타났었는지는 의문이지만 혜량과 그 밖의 몇 사람이 주동이 되어 경전을 강하는 일종의 연구적 모임이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576년에는 고승 안홍(安弘)이 중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불사리와 함께 ≪능가경 楞伽經≫·≪승만경 勝鬘經≫ 등 완숙한 대승경전을 가지고 오는 한편,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체류하고 있던 인도승 비마라(毗摩羅)·농가타(農伽陀)·불타승가(佛陀僧伽)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신라에 온 최초의 외국승려이다.
왕은 이 해에 머리를 깎고 사문이 되어 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였으며, 왕비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살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진흥왕의 불교진흥책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국선(國仙)과 화랑도(花郎徒)의 창설이다. 화랑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지만 역사적인 자료를 통해서 정확하게 살펴보면, 신라불교문화를 진흥시킨 진흥왕이 불교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설치하였던 청소년 수양단체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진흥왕이 나라를 흥하게 할 목적으로 불교의 미륵사상(彌勒思想)과 이상국가사상인 전륜성왕사상(轉輪聖王思想) 등을 중심으로 해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체에서는 신라의 미륵을 상징하는 국선이 모든 무리를 통솔하고, 그 아래에 각각 소단체의 우두머리로 화랑이 있어서 자기 무리의 낭도(郎徒)들을 거느렸다. 또 낭도에는 일반 소년낭도와는 달리 한 사람의 승려가 낭도로 있으면서 국선을 보좌하였다.
이와 같은 화랑도의 불교적인 면을 뒷받침하는 많은 사료 중에서 미륵선화(彌勒仙花)와 화랑 김유신(金庾信)의 용화향도(龍華香徒) 및 진흥왕의 아들 동륜태자(銅輪太子)·금륜왕자(金輪王子)의 이름 등은 움직일 수 없는 대표적인 사실(史實)의 예증이다.
(2) 진평왕대의 불교
진흥왕의 뒤를 이은 역대 왕들도 그를 본받아 불교문화를 진흥시켜서 훌륭한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어 신라불교를 더욱 꽃피우게 되었다.
진흥왕의 뒤를 이은 진지왕 금륜은 진흥왕의 둘째아들로서 태자 동륜이 일찍 죽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폐위되자 동륜의 아들 진평왕이 579년에 즉위하였다.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白淨)으로서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인 백정왕(白淨王, 일명 淨飯王)에서 취한 것이고, 왕비도 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을 그대로 취하여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하였다. 또한 진평왕의 아우 백반(伯飯)과 국반(國飯) 등도 인도 백정왕의 아우였던 백반왕 등의 이름에서 취한 것으로서, 이때의 왕실은 석가족의 왕명들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왕즉불(王卽佛)의 사상을 표시한 것으로, 그 뒤를 이은 선덕여왕의 이름 덕만(德曼)과 다시 그 뒤를 이은 진덕여왕의 이름 승만(勝鬘)도 다같이 불교에 연원을 두고 있다. 특히 승만은 ≪승만경≫의 여주인공인 승만부인의 이름을 취한 것이다.
이 진평왕 때에는 원광(圓光)·담육·지명(智命) 등의 고승들이 활동하였던 시기이다. 지명은 585년(진평왕 7)에 진나라로 가서 18년 동안 공부한 뒤 귀국한 고승으로, 무엇보다도 계행(戒行)이 깨끗하기로 유명하였다.
진평왕은 그에게 대덕(大德)을, 나중에는 대대덕(大大德)의 계위를 주어 존경하였다. 또한 596년에 수나라로 들어가 유학을 하고 605년에 귀국한 담육 지명과 견줄 만한 이 시대의 고승이었으나 그가 어떤 분야에서 활약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이 시대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고승은 원광이다. 그는 589년(진평왕 11) 중국에 가서 불법을 깊이 공부하고 교화활동 등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600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그가 남긴 큰 업적은 첫째, 대승의 경교(經敎)를 강설하여 대승의 법문을 펴고 크게 교화하였다.
둘째, 불교의 국가적 적응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608년에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수나라에 청병(請兵)하는 글인 걸사표(乞師表)를 써달라고 왕이 부탁하였을 때, 승려로서 자기 나라를 이익되게 하기 위해 남의 나라를 멸망시켜 달라는 글을 쓸 수가 없지만 신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백성의 도리로서 왕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걸사표를 써주었다.
셋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설한 점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벗을 믿음으로 사귀고, 싸움터에 나가면 물러서지 말아야 하며, 살생은 가려서 하라는 이 세속오계는, 평생의 교훈이 될 만한 가르침을 청하는 귀산(貴山)과 취항(箒項)에게 세속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일러주어 백성의 도리를 다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원광이 새로 제정한 것도 아니며 불경에 있는 말 그대로도 아니다. 그때까지의 신라 사람들에게 오래 내려오던 미덕들을 원광이 덕목화(德目化)하여 평생을 지킬 교훈으로 삼게 한 것이다. 그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베풀어졌고, 왕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3) 통일 전까지의 불교
진평왕 이후 신라가 반도를 통일하기까지인 632∼668년의 36년 동안에는 선덕여왕·진덕여왕의 두 여왕과 태종무열왕의 치세가 전개되었고, 마지막으로 문무왕이 그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선덕과 진덕의 두 왕은 여왕이었으나 그 속명(俗名)까지도 인도불교의 경전 속에 나오는 성녀인(聖女人)의 이름을 본떠서 지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독신자였다.
선덕여왕 때에 서라벌에는 분황사(芬皇寺, 634년)와 영묘사(靈妙寺, 635년) 및 황룡사의 9층탑이 조성되었고, 태종무열왕 때에는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 659년)가 창건되었다.
그 밖에도 금곡사(金谷寺)·법류사(法流寺)·원녕사(元寧寺)·통도사(通度寺)·수다사(水多寺)·석남원(石南院)·압유사(鴨遊寺)·실제사(實際寺) 등의 이름이 사기(史記)에 나타나 있다.
또한 664년(문무왕 4)에는 사람들이 함부로 불사(佛寺)에 재화(財貨)와 토전(土田)을 보시하는 것을 금할 정도였으므로, 이 시기의 신라불교는 백성들 사이에 보편화되어 있었고 매우 융성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승려의 수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634년(선덕여왕 5)에는 왕이 병으로 오래 누워 있었는데, 그때에 백고좌법회를 황룡사에서 열고 ≪인왕경≫을 강하게 하였으며, 승려 100명을 득도하게 하였다.
또 선덕여왕 재위기간에는 승려들이 중국으로 유학가는 일이 많았다. 이들은 귀국하여 신라불교의 전성기를 형성하게 되는데, 원효와 의상이 함께 당나라로 갈 것을 꾀한 일도 이때의 일이다. 원측(圓測)이 당나라 현장과 자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명랑(明朗)과 자장(慈藏)이 당나라로부터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크게 활약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또 당나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인도에까지 가서 구법(求法)을 한 승려들도 상당수에 달하였다. 인도의 나란타사(那蘭陀寺)에 머물면서 많은 불경을 읽고 깊이 연구하였으며, 본국으로 돌아오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70여 세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를 비롯하여 혜업(慧業)·현태(玄泰)·구본(求本)·현각(玄恪)·혜륜(惠輪)·현유(玄遊) 및 두 명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승려 등이 선덕여왕 때에 인도로 갔다고 전한다.
특히, 중국에서 교화활동을 하여 크게 명성을 떨친 뒤 귀국한 자장의 활동은 신라 불교를 재정비하고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중요한 업적은 첫째, 643년 (선덕여왕 12)에 귀국하면서 부처님의 바리[鉢盂]와 가사(袈裟), 사리(舍利)와 불경 400여 상자, 번(幡)·당(幢)·화개(花蓋) 등 법당을 장엄하게 꾸미는 물품을 가지고 와서 신라에 새로운 불교문화를 도입한 것이다.
둘째, 귀국한 뒤 대국통(大國統)이 된 그는 국내의 교단을 정비하고 승단(僧團)의 기풍을 쇄신하였다. 특히 보름마다 열리는 포살(布薩)을 엄격히 시행하고 겨울과 봄에 두 차례의 시험을 치러 잘못을 범함이 없도록 하였으며, 순사(巡使)를 보내어 지방사찰들을 돌아보게 하는 한편, 불교의식을 장중하고 엄하게 지내도록 함으로써 정법(正法)을 지키고 보호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불교의 일대 번영을 초래케 하였다.
셋째, ≪화엄경≫을 비롯한 대승경론을 강하고 통도사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만들어 계법(戒法)을 널리 폄으로써 국민의 대다수가 불교를 신봉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넷째, 호법(護法) 및 호국의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켰다. 불법을 신봉하고 널리 펴기 위한 호법의 불사로서 자장은 양산의 통도사와 오대산의 수다사, 태백산의 석남원, 원녕사·태화사(太和寺) 등 많은 절을 세웠다. 특히 오대산을 문수도량으로 설정하여 불국토신앙(佛國土信仰)의 대중화를 꾀하였다.
호국의 불사 중 대표적인 것은 왕에게 청하여 황룡사에 9층탑을 건립한 일이다. 그는 신라를 둘러싼 9개국의 침략을 막아 삼국을 통일하고 신라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상징으로 높이 225척의 이 탑을 건립하였다.
또한, 이 시대에는 일반대중들의 생활 속에 뛰어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불교를 골고루 전파한 선각자적인 고승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고승으로 혜숙(惠宿)과 혜공(惠空), 그리고 대안(大安)을 들 수 있다.
혜숙은 승려이면서도 일찍이 국선의 낭도로 있다가 안강의 적선촌(赤善村)에 살면서 왕도 중심의 귀족적인 불교의 범주를 벗어나서 시골사람들에게 불법을 알리고 서민을 교화하였다.
혜공은 본래 미천한 태생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신이한 행동이 많아 주인인 귀족으로부터 성인의 대우를 받았으며, 출가한 뒤에는 혜공이라 이름하였다. 그는 당시 승려들과는 달리 귀족적인 위치와 웅장한 절을 버리고 이름없는 작은 절에 살면서 매일 마을의 골목 거리를 다니면서 대중을 교화하였다.
허름한 옷에 삼태기를 등에 지고는 초부·목동이나 뒷골목의 건달, 술주정꾼들이나 가난한 서민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가까이 하였다. 서민교화의 선구자였을 뿐 아니라 학덕도 당대에 뛰어난 고승으로 일찍이 원효가 저술을 할 때 언제나 혜공을 찾아 물었다고 하며, 옷이 물에 젖지 않는 등 서민들 사이에 깊이 파고 들 수 있었던 이행(異行)이 많았던 고승이었다.
또한 본래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대안은 항상 특이한 모습으로 장터거리에 살았다. 언제나 동발(銅鉢)을 마주 치며 “대안 대안(大安 大安)”을 외치고 돌아다니면서 서민을 교화하였으므로 대안성자(大安聖者)라고 불렀다. 대안과 원효는 스승과 제자처럼 지낸 사이였다고도 한다.
이 시대의 불교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삼국통일의 주축이 되었던 화랑도와의 관계이다. 그때의 화랑도 속에는 승려들이 속해 있어 그들의 정신적 교육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화랑 출신의 장군들은 그 신앙에 의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하였다.
화랑들과 함께 있었던 실제사의 승려 도옥(道玉)은 655년(태종무열왕 2) 백제와의 싸움에서 화랑 김흠운(金欽運)이 전사하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건대 위로는 술업(術業:수행)을 잘 익혀서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고, 다음으로는 도용(道用:포교)을 일으켜서 남을 이익되게 하라 하였으나, 내가 상문(桑門:승려)의 용모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선(善)도 취할 수 없다. 차라리 종군하여 살신(殺身)함으로써 보국(報國)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리고는 승복을 군복으로 갈아 입은 뒤 이름을 취도(驟徒)로 바꾸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659년에는 한산주에 장의사를 세워 전사한 화랑들의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또한 15세에 화랑이 되었던 김유신은 그와 함께 하는 무리들을 용화향도라 하여 불교정신에 입각한 새 시대의 주인공들을 길렀을 뿐 아니라, 전쟁중에도 깊은 신심(信心)을 잃지 않았다.
661년 고구려와 말갈의 합병군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공격하여 성의 함락이 눈앞에 다다랐을 때, 김유신은 “사람의 힘이 이미 다하였다. 강조(降助:신이 내려와 도와 줌)를 얻을 수밖에 없다.” 하고 불사(佛寺)에 이르러 단을 만들고 기도를 올렸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진으로 떨어지며 우뢰와 비가 하늘과 땅을 진동하였고, 고구려병들은 포위망을 풀고 달아났다고 한다.
또 김유신이 왕명을 받들어 당나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에 쳐들어갈 때 현고잠(縣鼓岑)의 수사(岫寺)에 이르자 며칠 동안 행군을 멈추고 재계(齋戒)하고 정성껏 불공을 올린 뒤 행군을 계속하였다. 그는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을 그대로 소유한 전형적인 화랑이었다.
통일전야의 신라에는 밀교(密敎)가 들어와서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632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635년에 귀국한 명랑(明郞)은 밀교를 최초로 신라에 들여온 승려이다.
통일 후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려는 기세가 엿보일 때, 명랑은 밀교의 비법을 써서 당나라 군사를 무찔렀고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많은 고승들과 왕실을 중심으로 한 재가신자들의 노력으로 신라적 불교토착화가 이루어졌고, 통일 후 불교의 황금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불교 [佛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눌지왕 때, 고구려 묵호자가 불교를 전래.
- 법흥왕은 불교를 수용하려고 했으나, 고유신앙을 받들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
- 527년(법흥왕 14년)에 이차돈이 순교함으로써 귀족들을 누르고 불교를 공인.
- 흥륜사를 지으려고 하자 귀족들이 반대 -> 이차돈의 순교 -> 535년 착공
- 565년에 진나라에 유학을 갔던 '명관'이 1700여권의 경론을 가지고 왔다.
- 569년에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 완성되었다.
- 589년 '원광'은 진나라로 건너가 불법을 공부하고 600년에 귀국하여 대승불법을 전함.
- 601년 '안홍'은 수나라에 가서 경론을 두루 섭렵하고 605년에 귀국하여 처음 밀교를 전래.
- 636년 '자장'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643년에 귀국하면서 대장경 400여 함과 불사리를 가져옴.
- 자장은 분황사와 황룡사에 머물면서 대승론을 강의했고, 황룡사에 9층 탑을 건의하여 645년에 완성하였고, 646년에는 통도사를 창건하여 금강계단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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