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GJS-불교역사(3)

삼국시대-고구려

圓鏡 2014. 12. 14. 22:05

 

- 삼국시대의 불교 -

 

우리 나라의 불교는 인도나 중국 불교의 단순한 연장이나 퇴화가 아니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해서 만주대륙과 한반도 등의 우리 민족문화권에로 동류()한 뒤, 우리 나라의 지역과 풍토 및 민족성 안에서 독특하게 전개되었다.

 

1. 전 래

삼국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이다. 372년(소수림왕 2) 여름인 6월, 전진()의 왕 부견()은 순도()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하였다.

이에 소수림왕은 사신을 보내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순도로 하여금 왕자를 가르치게 하였다. 2년 뒤인 374년에는 진나라의 승려 아도()가 고구려로 왔다.

소수림왕은 그 이듬해 봄에 성문사()와 이불란사()를 세우고 순도와 아도를 각각 그 절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 두 절은 우리 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절이다.

고구려에서 처음 받아들인 불교는 ‘인과적() 교리로서의 불교’ 또는 ‘구복()으로서의 불교’라 하는데, 이는 재래의 토속신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삼국 중에서 고구려가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여 새로운 관념형태를 형성함으로써, 삼국 중 가장 먼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성의 기틀을 잡게 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391년(고국양왕 8)에는 영을 내려서 불교를 숭신()하여 구복하게 함으로써 불교를 더욱 장려하였다.

백제에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384년(침류왕 1)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서 서울인 광주()의 남한산으로 들어오자 왕은 그를 궁 안에 머물도록 하였고, 그 이듬해 10명의 백제인을 출가시켜 승려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뒤 160여 년이 경과한 성왕 때까지는 불교관계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다가, 526년(성왕 4)에 인도로부터 귀국한 겸익()을 맞이함으로써 크게 발전을 보았다.

신라의 불교 수용은 순탄하지 않았다. 신라가 고구려의 세력을 배경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로부터 묵호자()가 신라의 서북경지방인 일선군()에 들어와 모례()의 집에 기숙하면서 불법을 전하였으며, 모례는 신라인으로서 최초의 신도가 되었다.

그때 중국의 사신이 향()을 가지고 왔으므로 묵호자가 나아가 분향예불()하는 법을 가르치고 공주의 병을 완쾌시킴으로써 신라왕실에서도 불교를 알게 되었으나 별로 신도를 얻지 못하였다.

그 뒤 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에서 아도()가 들어와서 불법을 전도한 뒤로는 신봉하는 자가 늘어났다. 신라에 왔던 아도는 고구려에 왔던 중국승 아도와는 동명이인()으로, 아도라는 이름은 머리가 없는 자라는 뜻으로 삭발승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보고 있다. 그 뒤에도 신라왕실은 불교공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씨족중심 귀족들의 끊임없는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씨족적 기반을 억누르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확립하고자 했던 왕실파()들은 법흥왕 중심으로 불교를 새 지배체제의 구축을 위한 정신적 지주로 삼아서, 왕법()과 불법()을 동일시하고 부처의 위력을 왕의 위력으로 대치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520년(법흥왕 7)에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조직에 관한 정비를 일단락 지은 법흥왕은 527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배불파()를 제압하고 불교공인을 선포하였으며, 529년에는 영을 내려 살생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차돈이 순교한 지 7년 뒤에는 그가 절을 만들고자 했던 천경림()에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를 창건하였고, 법흥왕은 왕위를 진흥왕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승려가 되어 법공()이라고 불렀다. 이때의 불교는 ‘선행수복()으로서의 불교’, ‘인과적 교리로서의 불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고구려의 경우처럼 토속신앙과 자연스럽게 혼합되었다.

2. 삼국시대

고구려의 불교

(1) 전 개

고국양왕이 불교를 신봉하라는 영을 내린 이듬해인 392년(광개토왕 2)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였고, 395년에는 진나라 승려 담시()가 교화를 위해 고구려로 왔다.

담시는 불교의 교리연구 및 설법의 이해에 필요한 경률() 수십 부를 가지고 왔고, 수계()를 베풀어 불제자가 되는 길을 트이게 함으로써 불교역사상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맞게 하였다.

498년(문자왕 7)에는 대동강변에 금강사()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으며, 576년(평원왕 18)에는 의연()을 중국 북제로 보내어 정국사()의 법상()에게 불기() 및 중국의 불교전래 등 불교의 역사전개와 교학()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배우게 하였다.

그는 대승론서()의 저자 및 저술 연기(), 그 저술이 갖는 영험 등에 관한 것을 자세히 배워가지고 돌아왔는데, 그가 관심을 가지고 새로 가져온 경론()들은 후일에 신라의 학승들이 철학의 전거로 삼아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구려의 불교도 27대 영류왕 때에 들어온 도교의 득세로 말미암아 점차 빛을 잃고 말았다. 도교는 624년(영류왕 7)에 들어왔으며, 643년(보장왕 2)에 연개소문()이 당나라로부터 숙달() 등 8명의 도사와 ≪노자도덕경 ≫을 받아들인 뒤부터는 불교를 박대하였다.

사찰을 몰수하여 도관()으로 삼았고 그때까지 불교인을 대우하던 자리에 도교인을 앉히는 등 불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하였다.

이 갑작스러운 변동에 불교인들 중에는 견디다 못해 외국으로 망명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특히 보덕()은 이를 고구려 멸망의 징조로 여기고 여러 차례 조정에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당시 백제 땅인 완산주()의 고대산(, )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그 뒤 고구려는 곧 멸망하게 되었다.

(2) 구법() 및 전교활동

고구려의 승려가 외국으로 나가서 불교문화활동을 한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중국으로 가서 구법활동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서의 전교활동()이다.

중국으로 가서 법을 구한 승려는 의연을 비롯하여 몇 명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고구려의 고승이었던 승랑()은 장수왕 말년경에 중국으로 가서 삼론학()을 공부한 뒤 중국 삼론종의 종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삼론()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여 확립시켰다.

삼론종은 ≪중론 ≫·≪십이문론 ≫·≪광백론 ≫의 삼론에 의거하여 반야중도사상()을 강조한 종파로서, 승랑 이전까지는 삼론과 ≪성실론 ≫을 함께 취급하여 학적인 분리 및 연구가 없었으나, 승랑이 ≪성실론≫을 삼론과 완전히 분리시키고 새로운 학적 체계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중국인을 가르친 승랑이 중국불교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이 밖에도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서 유명한 수나라의 지의에게서 공부한 뒤 그곳에서 영이()와 기서()를 보이다가 세상을 떠난 파야()와 중국승려인 스승과 함께 인도로 갔던 현유()는 사자국(:스리랑카)에까지 가서 살았다고 전한다.

6세기 중엽 이래로 고구려의 왕실과 조정이 불교를 등한히하고 박해하는 태도를 노골화하자 많은 승려들은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일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던 고구려에서 그 뿌리를 제대로 펴지 못한 채, 거기서 길러진 고승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른 나라에서 그 뜻을 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양원왕 때에 신라로 온 혜량()은 찬란한 신라불교의 밑거름 구실을 하였다.

일본 포교에 힘쓴 고구려 승려들로서는 혜편(便)·혜자()·승륭()·담징()·혜관()·도등()·도현() 등이 있다. 혜편은 584년에 소가노우마코()의 요청으로 시바다쓰()의 딸인 선신()과 선장()·혜선()을 가르쳐 출가시킴으로써 일본 귀족들의 존숭을 받았다. 그가 일본 최초의 비구니를 탄생시킨 것이다.

혜자는 595년 고구려의 승려로서 일본에 귀화하여 불교를 크게 진흥한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백제의 승려 혜종과 더불어 호코사()를 창건하였다. 이 절은 뒤에 계속 많이 건너온 고구려와 백제 승려들의 거처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을 불교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또 담징은 유교의 오경()에 통달해 있었을 뿐 아니라 공예·채색·지묵()에도 능하여 일본미술사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혜관은 쇼토쿠태자가 창건한 강코사()에 머물면서 반야중도사상을 천명하고 삼론()을 강의하여 심오한 불교철학을 일본에 심어준 승려이다.

일본의 사서()에는 큰 가뭄을 맞았을 때 혜관이 기우()를 하여 큰비를 내리게 한 공로로 승정()에 뽑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등 역시 삼론종의 승려로서 일찍이 당나라로 들어가 길장()으로부터 삼론의 뜻을 배운 뒤 일본으로 건너가서 우지강()에 큰 다리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다리로서가 아니라 중생을 피안으로 건네준다는 종교적 의미로 일본 왕의 고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말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도현은 칙명으로 다이안사()에 머물면서 불법을 펴는 한편, ≪일본세기 ≫ 등 몇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이 밖에도 적지 않은 승려들이 일본에 가서 활약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유학승을 보내어 고구려의 불교문화를 배워갔다.

[네이버 지식백과] 불교 [佛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서기 372년 (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전래.
  • 서기 374년 승려 아도가 들어와, 이듬해 초문사를 지어 순도가 머물게 하고, 이불란사를 지어 아도가 머물렀다.
  • 서기 391년 광개토대왕은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하교하고, 즉위 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다.
  • 서기 396년 동진의 담시가 들어와 수십 종의 불경을 10여년 동안 전파하고 돌아갔다.
  • 장수왕 때에 유송(?)에 간 승랑은 그 곳에서 삼론학을 연구하여 체계를 세웠고, 500년에는 강소성 서하사의 주지.
  • 평원왕 때 일본으로 건너간 혜편은 일본 최초의 비구니승 3명을 배출하였다.
  • 551년(진흥왕12년) 혜량은 신라로 건너가 신라 최초의 승통이 되었다
  • 595년 영양왕 때 일본에 건너간 혜자는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 610년 담징은 일본에 채색, 공예를 가르치고, 종이와 먹을 제작하는 방법을 전했다.
  •   담징은 법륭사에 머물며, 불법을 전하고 금당(대웅전)의 벽화를 그렸다.
  • 625년 혜관은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 승려 관륵에 이어 제2대 승정이 되었다.
  •   혜관은 삼론학을 전하고, 일본 삼론종의 개조가 되었다. -> 삼론은 용수의 저술서적으로 모두 空에 관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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