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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과학자 대회'의 진화론과 종교의 관계

圓鏡 2014. 12. 7. 08:05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지가 발달하여 창조론의 절대신앙은 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최근의 동향을 보면, 과학계에서 내세우는 것이 모두 다 옳고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차츰차츰 생명의 정체를 비롯하여 자연의 법칙이며 우주의 모습에 대해서 과학자들이 일찌기 세워놓은 가설들이 사실이거나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에 대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신뢰하는 경향이 있읍니다.


몇 해 전에 런던에서 '세계 과학자 대회'가 열렸읍니다. 19세기에 다아윈이 진화론을 발표하자, 세상은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그 때에 진화론을 앞장서서 소개하였던 사람이 헉슬리 였읍니다. 바로 그 사람의 손자 되는 사람이 또한 영국의 과학계를 주도하는 유명한 과학자가 되어 이 회의를 주재하게 되었읍니다. 이 대회의 명칭은 '세계 과학자 대회'이지만 다른 모든 분야에 대해서도 토의를 해보자는 의도가 있어서 종교 문제까지 논의하게 되었읍니다. 그리하여 종교 문제를 토의하는 데에는 그 방면의 전문가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신부, 목사, 심리학자들도 그 대회에 참석하였읍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과학자 대회에서 토의된 종교 문제에 대한 의견을 종합하여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과 같은 우주과학 시대에는 신을 전제로 하는 종교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란 허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떠한 종교가 앞으로 존속할 수 있는가? 불교와 같이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종교만이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성직자와 신학자들을 앞에 두고 세계 과학자 대회는 이렇게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종교만이 존속될 수 있다는 중대 선언을 했읍니다. 이는 참으로 놀랍고도 획기적인 선언이었읍니다. 서양에서의 기독교 신의 존재는 다만 종교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으니, 이천여 년을 내려오며 그들을 지배해 온 전통이요, 사상이며,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일대 혁명이랄 수 있는 이 선언은 결국 믿음이라는 근본 문제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 때에 카톨릭이나 기독교의 대신학자들이 많이 참석을 하였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하였읍니다. 그와 동시에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불교와 같은 종교만이 존속할 것이라는 데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를 내놓지 못하였읍니다.』 -성철스님 법어집 `영원한 자유`에서-

 

대철학자인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하여 파문을 일어킨 적도 있지만, 천주교에서는 교황청에서 3년의 논쟁 끝에, 저들의 모든 교리의 입문서인「교리문답」을 창조론을 폐지하고 진화론을 채택하여 성경과 상충되는 내용으로 바꾸고 말았고, 또한 저들 스스로 하나님은 죽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으로서 있으니 이 성령 속에서 하나님을 찾자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의 약속이 가톨릭, 프로테스탄트에 다음가는 제3의 기독교로 성취된다고 주장하면서 저들은 또 한번의 출애굽의 시도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기독교의 무신론입니다.

 

이것은 다 인지의 발달인 과학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 이외에도 성철스님 법문집 [영원한 자유]에서는 여러가지 기독교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비교적 과학적인 사고에 대하여 개방적이던 천주교에서 보수적 절대신앙 쪽으로 태도를 바꾸는 경향 또한 있었는데, 이것은 과학의 영향으로 급격한 변화로 인하여 존립에 대한 위기감마저 느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창조신이라는 것은 허위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사랑이라는 것은 창조신의 절대 권능에 대한 복종일 뿐 다른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사랑(자비)이라는 것은 자유하지 못함에 대한 연민입니다. 참진리는 영원한 자유입니다. 해탈입니다.

한 티끌에서 부터 온 우주법계가 그 참모습은 진실하여 진정으로 자유한 해탈입니다. 이것을 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이라고 하고 화엄경에서는 일진법계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부처님께서 제일성으로 이르셨던 중도입니다. 중생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자유하지 못함에 대하여 애민히 여겨서 하는 일체의 행위가 불교에 있어서 자비입니다. 깨달음은 영원한 자유 해탈이며 그것이 우주법계의 참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성취하면 영원토록 원융무애한 자비를 실천합니다.

이것이 불행(佛行)입니다.

 

wjdwls3 | 2013.09.27 12:01 |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