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정사 법회보, 2013년 1월호에서 발췌
공양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존경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존경하게 되면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어집니다.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는 것도 부처님이 너무 존경스러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공양의 다른 의미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고마운 사람에게는 꼭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 공양 ( 즉 존경과 감사 )의 마음을 표현할 때에는 정신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육체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정신적인 표현은 법공양이고 물질적인 표현은 재물공양입니다. 그 공양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경전에는 부처님, 여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경의 대상, 찬탄의 대상, 공양의 대상은 온통 여래 부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매우 이렇게 부처님이 특별한 분으로 되어 있기에, 우리는 평소 일상생활을 통해서 공양을 실천하려고 하기 보다는 특별한 존재로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께만 공양을 올리려고 합니다. 그 결과 불교공부, 불교수행이 일상의 삶과 하나가 되지 않고 둘로 갈라집니다. 수행과 삶이 더 가까워지지 않고 반대로 더욱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여래가 어떤 존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격적 개념인 부처님을 논리적, 철학적 개념을 바꾸면 인드라망 존재 또는 연기법의 존재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의 물이 모두 금으로 바뀐다면 좋겠습니까? 물이 있어야 밥도 해 먹고 맥주도 만들어 마시고 하는 것입니다. 먹어야 부처님도 살고 우리도 참선을 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물은 물로 있어야 합니다. 물이 물이어야 하듯, 그 개성이 절대로 바뀌면 안 되는 것을 우리는 '귀하다. 거룩하다'고 합니다. 물은 대단히 고마운 존재입니다. 물은 내 생명을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너무나 고마운 존재입니다. 물은 내 생명의 부처님, 하느님입니다. 거룩하고 귀하고 고마운 존재이므로 여래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제대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을 깨달은 자,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경해야 할 대상이 법당 안에만 있습니까? 온 천지에 부처 아닌 존재가 없습니다. 발에 차이는 게 모두 부처님입니다. 예경을 올릴 대상도 찬탄을 해야 할 대상도, 공양을 올릴 대상도 이 세상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눈을 뜨고 귀를 열면 보고 듣고 만나는 대상 하나하나가 모두 다 예경의 대상이고 찬탄의 대상이고 공양의 대상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만일 일상적으로 예경, 찬탄, 공양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 삶 자체가 기쁨이고 아름다움이고 평화이고 행복 아니겠습니까? 그대로 해탈이요, 지고지순의 열반입니다. 예경제불원에서 예경은 몸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고, 칭찬여래원에서 찬탄은 입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광수공양원에서 보면 공양은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 바치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관계없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는 앞에서 말했듯이 그게 법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법의 길이란 만고의 진리이고 만인이 반드시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 길만이 참된 길이고 유일무이한 본래 길입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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