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
[ 목 차 ]
< 서 론 >
I 불교의 세계관에 대해서
II 불교의 물질관에 대해서
III 불교에서 본 정신과 물질과의 관계
IV 유식학의 물질관
< 본 론 >
< 결 론 >
- 참고문헌 -
< 서 론 >
흔히 불교는 정신만을 강조하고 물질을 소홀히 하는 교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오해는 마음과(心)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적 측면이 지나치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유식학은 그러한 오해의 중심에 서있다. 하지만 유식학도 엄연히 12處, 18계와 같은 불교적 세계관과 물질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오위백법(五位百法)에 나타난 色法(色法十一種)사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본 보고서는 불교 전반의 물질관과 세계관에 대해서 살펴본 후 색법11종 사상에 나타난 물질관에 대해서 살펴보고, 물질과 정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겠다.
< 본 론 >
I 불교의 세계관에 대해서
1. 우주론
(1) 우주의 형성 : 우주의 형성은 우선 아무런 존재도 없는 광대하고 텅 빈 공간에 사트바 카르만의 힘이 활동함으로써 '미풍(微風)'이 불면서 시작된다. 점차 이 바람은 공간 속에서 그 밀도를 더해가고, 급기야는 원반 모습의 견고한 '대기의 층'이 이루어진다. 이 대기층의 두께는 160만 요자나에 이른다고 한다. 요자나라는 거리는 단위가 정확히 얼마만한 거리인가에 대한 논서의 기술은 없지만, 500심(尋)이 1크로샤, 8크로샤가 1요자나라고 하고 있으므로, 1심을 2미터라고 본다면 1요자나는 8킬로미터가 된다. 그렇다면 이 대기층의 두께는 1280만 킬로미터이다. 그리고 그 주위에 이르는 거리는 아상키야라고 한다. 아상키야(asamkhya)란 '무수'라는 의미이므로, 결국 대기층의 횡적인 거리는 무한하다. 그러나 이 아상키야라는 말은 수를 표현하는 단위의 하나로서도 사용된다. 이 경우에는 1059를 의미한다. 따라서 대기층의 주위가 아상키야라는 것은 이것이 1059 요자나라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막연한 '무수'라고 하기보다는 이편이 명확하므로 우리는 아상키야라는 말을 이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대기층 위에 '물의 층'이 형성된다. 이는 사트바 카르만의 활동에 의해 대기층의 중심부 상공에 점차로 구름이 응집되고, 그 구름이 장대비가 되어 대기층에 떨어지면, 이것이 쌓여 물의 층을 이루는 것이다. 그 두께는 896만 킬로미터로 산정 된다. 물은 대기층 중심부에 집적될 따름으로 결코 옆으로 넘쳐흐르는 일이 없다. 사트바 카르만의 힘이 이를 받쳐 넘치지 않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또는 바람이 그 주위를 선회함으로써 바람의 압력이 담장을 둘러치듯이 물의 층을 지탱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물의 층은 다시 사트바 카르만에 의해 부는 바람으로 말미암아 "끓인 우유의 표면에 막이 생기는 것 같이" 점차 응고되어, 상층의 7분의 2는 '황금의 층'이 된다. 나머지 7분의 5는 물의 층으로 남아있다. 앞에서 대기층의 중심부에 물의 층이 형성되었다고 하였는데, 이 물과 황금의 층의 넓이는 대기층에 비해 훨씬 작아 겨우 직경이 962만 7600 킬로미터, 주위는 직경의 3배, 즉 2888만 2800 킬로미터 정도로 생각되고 있다.
결국 무한하다고 하여도 상관이 없는 광대한 원반에 펼쳐져 있는 대기층의 중심부에, 이에 비해서는 훨씬 작으나 동일한 원반 모습의 물과 황금의 층이 중첩되어 놓여 있다. 다만 층의 두께에 대해 말한다면, 대기층이 10이라면 물의 층은 5, 제일 위의 황금의 층은 2에 해당된다. 이 황금의 층의 표면이 대지이다. 그리고 대지 위에는 다시 순서에 따라 뒤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산·강등이 형성되며, 이리하여 여기에 자연계가 완성되는 것이다. 자연계가 완성되면 여기에 생물 즉 유정(sattva)이 발생한다. 이 발생에도 정해진 순서가 있어, 우선 천상의 세계부터 시작된다. 즉 처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하늘의 신들(天人, 天女등이 그것이다. 신들이라고 하여도 사트바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이다. 다음으로는 지표 세계에 인간·동물 등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지하 세계 즉 지옥에도 지옥의 사트바가 태어남으로써 세계형성의 과정은 완료된다.
(2) 수메루의 세계 : 자연계의 구성을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대기층·물의 층·황금의 층이 중첩된 그 위에 대지가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대지 중앙에는 수메르(sumeru, 須彌)山이 높이 솟아있고, 그 주위를 외륜산(外輪山)이 일곱 겹으로 에워싸고 있다. 가장 바깥의 외륜산을 니민다라(nimindhara)라고 하는데, 이 니민다라산의 바깥에 네 개의 대륙이 있다. 동쪽에 비데하(videha)州, 서쪽에 고다니야(god?niya)州, 남쪽에 잠부(jambu)州, 북쪽에 쿠루(kuru)州가 그것이다. 이 네 개의 대륙 바깥을 차크라발라(cakrav?la)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외륜산이 둘러싸고 있다. 중앙의 수메루산과 그 바깥을 둘러싼 일곱의 외륜산 사이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 고리 모양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나아가 그 바깥 차크라빌라산까지 폭 250 킬로미터 이상의 고리 모양의 큰 바다가 있고, 네 대륙은 이 바다의 동서남북에 각각 돌출되어 있다. 수메루산은 동서남북의 사면이 각각 은·수정·에메랄드·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곱의 외륜산은 금으로, 차크라빌라산은 쇠로 이루어져 있다. 수메루는 허리가 가늘어 모래시계와 같은 모습이며, 그 산정은 한 변이 64만 킬로미터의 정사각형의 평면이라고 한다. 해와 달도 사트바 카르만에 의해 형성된 바람에 의해 공중에 걸려있다. 해의 직경은 408킬로미터, 달의 직경은 400킬로미터로서, 모두 수메루산의 잘룩한 허리 주위를 일주하는 데에 24시간이 걸리는 속도로 선회하고 있다.
수메루산과 일곱 외륜산의 허리와 산정은 천계(天界), 즉 신들의 세계의 일부이다. 수메루산의 허리 아래, 일곱의 외륜산 위, 그리고 해와 달 위에는 차투르마하라지카(Caturmah?rajika, 四大天王 또는 四天王)로 불리는 최하급의 신들이 거주한다. 수메루 산정에는 트라야스트링샤(Tr?yastri??a, 三十三千, ?利天)라고 불리는 신들이 거주한다. 이들보다 상급의 신들은 더욱 높이 공중에 거주한다고 한다. 지하의 세계(지옥)는 어디에 있는가. 잠부주 아래 16만 킬로미터가 되는 곳에 넓이 16만 킬로미터에 걸쳐 아비치(avici, 阿鼻)지옥이 있다고 한다. 아비치의 위쪽에는 각각 8층으로 '八熱地獄'과 '八寒地獄'이 있다. 또한 잠부주 지하 4천 킬로미터 되는 곳에 사자(死者)의 왕 야마(yama, 閻魔)가 거주한다고 한다.
지상의 세계에서 우리가 사는 곳은 수메루산의 남쪽, 일곱 외륜산 바깥의 큰 바다 가운데에 삼각형으로 돌출 되어 있는 잠부주이다.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하늘의 색이 푸른 것은 수메루산의 남쪽 면을 이루는 에메랄드가 빛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유정(有情)의 세계
이 광대한 우주 가운데에는 무수한 생명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이렇게 발생한 생명 하나하나는 또한 각각 무한의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삶과 죽음을 영구히 반복하고 있다. 불교의 주요 관심은 우주·자연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태어나고 죽어 가는 생명체, 즉 유정(有情)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주론에서 한 걸음 나아가 유정론 또는 인간론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논의될 유정의 존재방식은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셋을 말한다. 욕(欲)이란 생물의 본능적 욕망으로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욕계는 그러한 본능적 욕망이 성하고 강하게 작용하는 세계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색'은 색채가 아니라, 색깔과 형태를 갖는 물질적 존재의 의미이므로, 색계란 물질의 세계, 물질이 존재하는 세계가 된다. 물론 색계 뿐만 아니라 욕계도 물질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점에는 다름이 없다. 다 같은 물질적 세계이지만, 특히 본능적 욕망이 치성한 곳을 욕계라고 부르며, 이와 같이 욕망이 치성하지 않은 곳을 단순히 색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무색계는 문자 그대로 '색'이 없는 세계,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욕계 보다는 색계가, 색계 보다는 무색계가 뛰어난 생존양식으로 지상의 각 부분에 위
치하고 있다.
지하의 세계에는 지옥(地獄), 지상의 세계에는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의 여섯 가지의 삶을 육취(六趣, 六道)라고 한다. 그 중에서 인간까지의 오취와 천 중의 최하급 6종(六欲天)이 욕계에 속하며, 천 중의 중급의 것이 색계에, 상급의 것이 무색계에 속한다. 천계가 다른 모든 세계보다 행복하고 바람직한 삶이라고 해도 이 역시 전변(轉變)과 쇠망을 피할 수 없는 세계로서 윤회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유정은 이 육취중의 어느 하나에 속하여 살아간다. 죽으면 또한 육취의 어느 하나로 태어난다. 예를 들어 인간의 한 생애를 마치고 인간의 한 생애를 마치고 하늘의 신으로 태어나는 유정도 있을 것이며,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윤회의 경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지옥의 바닥에서 고통을 겪는 자도 천계의 생활을 향수 하는 신도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사생이란 이와 같이 유정이 윤회하면서 여러 가지 경우로 태어날 때, 그 태어나는 방법의 종류를 분류한 것이다. 이는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의 넷을 말한다.
II 불교의 물질관에 대해서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현상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비밀이 속속들이 밝혀져 왔다. 이 작업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관되게 진행되어 온 그 방법은 하나의 물질을 계속 쪼개어 분석하면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근본실체가 무엇이냐를 밝히는 것이다. 아울러 모든 물질에 공통되는 성분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사실 이러한 작업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일찍부터 시도되었다. 물론 과학기구가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오로지 인간이 지닌 이성의 추리에 의존했지만, 그 결론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동일한 바가 있다. 즉, 모든 물질은 근본적으로 몇 가지의 동일한 요소로 구성된다는 요소설(要素說)이 그것인데, 그 중 네 가지 요소에 대해서 만큼은 그리스와 인도와 중국에서 모두 근본바탕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1. 극미(極微)설
현대과학에 우주론과 함께 원자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에도 삼천대천세계의 설과 함께 원소설과 원자설이 있다. 말하자면 극대(極大)의 세계에 대한 극미(極微)의 세계를 설명함이다. 다만 삼천대천세계설은 주로 구사론의 <分別世品>에 있는데 대하여, 원소설과 원자설은 구사론의 <分別界品>이라는 장에 있다. 삼천대천세계의 설이 윤회사상의 기반 위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반해서, 원소설과 원자설은 인도 고대로부터 전해진 물질 사상에 그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원소설에 의하면 모든 물질은 地·水·火·風의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다. 원소에 대하여 다른 쪽에는 원자가 있다. 불교 경전에서는 이것을 극미(極微, param??u)라고 한다. 극미는 '최소의 물질이면서 자를 수도 파괴할 수도 없고, 취한다거나 잡을 수도 없다. 길지도 짧지도 않고, 사각형도 둥근형도 없다. 분석할 수가 없으며, 볼 수도 들을 수도 접촉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극미의 원어인 parama?u는 가장 미세한 것을 뜻한다.
원자는 미립자이지만 입체적으로 이를 둘러싼 면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면을 갖는다면 이를 더욱 분할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된다면 이는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를 둘러싼 면을 갖지 않는 미립자, 이것은 수학에서 말하는 점의 개념에 가까운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자 한 개를 중심으로 그 전·후·좌·우·상·하에 각각 하나의 '원자'가 결합되어 합계 7개의 원자가 집합된 것이 제2의 단위의 아누, 즉 하나의 '미립자'를 이룬다. 이와 같이 7개의 원자가 모여 하나의 미립자를 형성할 때, 하나하나의 원자는 상호 다른 원자와 접촉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느 아비달마논사의 논쟁의 과제이기도 하였다. 하나의 원자가 다른 원자와 접촉하는 경우에는, 그 일부가 접촉하든가 전부가 접촉하든가이다. 전부가 접촉한다면, 이들 두 개의 원자는 완전히 중복되어 버리고, 일부가 접촉한다면, 원자가 부분을 갖는 것으로, 분할 불가 원칙에 어긋나므로 결국 원자는 어떠한 접촉도 없다고 하는 설이 올바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원자설의 일차적인 의미는 물질적 존재의 근본적 성질 즉 공간점유성에 있다. 원자는 물질의 공간적 연장을 극한적으로 분석한 것으로, 그 자체로는 부분을 갖지 않는다. 즉 공간적 연장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집합은 공간적 연장을 가지며, 구체적인 물질을 형성한다. 무표색을 제외한 모든 '색'은 이러한 무수한 원자가 집합된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함으로써, '색'의 공간점유성 즉 물질의 양적인 형식은 잘 표현된다. 그러나 이로써는 물질의 질적인 형식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때로는 원자 자체에 그러한 질적인 형식을 규정하는 힘이 있음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원자설이 본래의 영역을 넘어, 이와는 입장을 달리하는 4원소설 등과 결합된 결과이다.
2. 사대설(四大說)
인도에서는 물질의 4가지 근본요소를 四大라고 불렀다. 사대란 흔히 地·水·火·風이라고 표현되는데, 이들은 실제에 있어서 각각 고체성·액체성·열·운동을 뜻한다. 이 네 가지 요소들이 적절히 화합하여 물질적인 형체를 이루는데, 불교에서는 이런 물질적 형체를 색(色)이라고 부른다. 인간도 우주 속에 있는 물질적 존재인 한, 색은 인간존재의 근저를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색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근간이 되는 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을 구성하는 근간적 부분은 물질적 형체인 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가 성립할 당시 인도의 유물론자들은 인간을 오로지 4대의 화합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러한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특히 경계하였다. 인간이 외형상 물질적 존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을 구성하는 또 다른 근간적 부분으로서 정신적인 것이 있음도 아울러 주목하였던 것이다. 정신적인 부분에는 역시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으며, 물질적인 부분을 색이라 칭했던 것처럼 정신적인 부분을 명(名)이라고 칭했다. 결국 부처님은 인간이란 정신과 물질의 결합체라고 파악했던 것이다.
(1) 물질의 견성(堅性)과 지대(地大) : 모든 물질에는 견고한 성질이 있으며 이것을 지대(地大)라고 한다. 견고한 성질은 물질을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성질을 의미하며 손으로 만져보거나 아니면 몸으로 부딪혀보면 딱딱하고 또 서로 장애가 될 수 있는 현상을 나타낼 수 있는 성질을 의미한다. 이는 모두 견고한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닷물은 견고한 성질이 없는 것 같지만 큰 배가 뜰 수 있는 것은 견고한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물질의 성질은 견고한 면이 있으며 이 견고한 성질은 몸을 중심한 견고성과 몸밖에 모든 물체의 견고성 등 둘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大毘婆沙論》에 의하면 몸을 중심한 견고성은 내부 가운데의 견고성이라 하고 대지(大地)에 있는 모든 물체의 견고성은 외부의 견고성이라고 이름하고 있다.
(2) 물질의 습성(濕性)과 수대(水大) : 자연계의 모든 물질에는 습성이 있으며 이들 습성을 수대(水大)라고 한다. 수대는 물질 속의 물 기운을 뜻하며 아무리 견고한 성질을 나타내는 물질이라고 하더라도 미량의 습성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 기운은 무한하고 무변 하다는 뜻에서 大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들 물질의 습성에도 내면의 습성과 외면의 습성이 있다.
(3) 물질의 난성(煖性)과 화대(火大) : 물질에는 따뜻한 불의 성질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며, 이 불기운을 화대(火大)라고 한다. 화대도 몸과 자연계의 난성(煖性)으로 나누어 내면의 난성과 외면의 난성으로 설명한다.
(4) 물질의 동성(動性)과 풍대(風大) : 《비바사론》에 의하면 물질에는 동력(動力)이 있다고 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에는 동력이 포함되어 있어 바람을 비롯한 다양한 동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을 모두 풍대(風大)라고 한다. 이 풍대의 동력은 내부와 외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3. 오온(五蘊)중의 색온(色蘊)
인간의 '근간이 되는 부분'을 불교에서는 온(蘊)이라는 말로써 표현한다. 온이란 쌓임·모임·집합 등을 의미한다. 이 말은 특히 인간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몇 가지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 즉,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형체인 색이라는 집합과 정신을 구성하는 네 가지의 집합을 일러 5온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온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오온(五蘊)이란 물질의 색온과 정신의 수온(受蘊)·상온(想蘊)·행온(行蘊)·식온(識?)이다. 이러한 오온설의 근본 의도는 인간의 정신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 중의 어느 한 면만을 중시하지 않아야 함을 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온중의 수는 즐거움이나 고통 등의 감정을 느끼는 감수작용으로서, 외계의 자극에 대하여 뭔가의 감각·지각·인상 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은 대상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표상작용으로서, 이의 대상은 반드시 외계만이 아니라 기억의 내용 등도 포함된다. 감수된 것을 색깔이나 모습 등으로 마음속에 그리고 표상 하여 개념화하는 것이다. 행은 의지 및 그 밖의 정신작용으로서, 어떠한 정신을 형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하여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작용을 가리키며, 또는 보다 넓은 의미로서 잠재적으로 형성되는 힘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신체와 언어와 의식으로 표출되는 업(業)을 형성하는 작용이다. 식은 판단이나 추리에 의한 식별 작용을 가리킨다. 대상을 구별하여 인식하는 것이고, 어떠한 인식에 대해 판단하는 의식작용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마음의 작용 전체를 통괄하는 기능도 지니며, 마음 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한편 색온은 인간의 구체적인 신체기관으로 드러난다. 즉, 눈·귀·코·혀·몸 마음이다. 이것이 마음을 물질인 육체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은 4온이라는 정신적 집합을 담는 하나의 그릇으로 생각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질의 집합인 이런 신체기관을 통하여 인간은 외부의 대상을 내면으로 끌어들여 느끼고 생각하고 작용하고 식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오온설은 결국 색온으로써 모든 물질적 요소들을 끌어들여 나머지 4온으로써 인간의 심리적 요소를 드러내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시불교에서는 인간이 이같은 다섯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즉, 오온의 원래 의미는 인간의 심신(心身) 전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교리가 발전하면서 이러한 오온의 의미가 점차 확대되어, 이윽고 인간의 심신 뿐 아니라 주변의 세계 전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즉,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전체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특히 인간존재로 한정하여 오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할 때는 오취온(五取蘊)이라는 말을 별도로 사용하기도 한다. 또 오온을 오음(五陰)이라고도 한다.
4. 십이처(十二處)설 중에 나타난 물질론
근본교설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일체(一切)라는 것이 십이처(十二處)에 의해서 포섭되는 것이라고 설하고 계신다. 이 때 십이처라는 것은 눈(眼)과 색(色), 귀(耳)와 소리(聲), 코(鼻)와 냄새(香), 혀(舌)와 맛(味), 몸(身)과 촉감(觸), 의지(意)와 법(法)이다. 따라서 십이처를 떠나 다른 일체를 설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만 언설(言說)일 뿐, 물어봐야 모르고 의혹(疑惑)만 더해 가는데, 이는 그러한 언설들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하셨다. 이러한 십이처설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며 일체만유(一切萬有)에 대한 일종의 분류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종교적 세계관으로서는 너무나도 소박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입장이 선언(宣言)되는 사상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는 십이처의 구성이 눈·귀·코·혀·몸·의지라는 여섯 개의 인식(認識)기관인 육근(六根)과 색·소리·냄새·맛·촉감·법이라는 여섯 개의 인식대상인 육경(六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모든 존재를 인간의 인식 중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는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십이처설에서 인식 주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六根)은 그대로 인간존재를 나타내고, 인식객체(認識客體)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대상 즉 육경은 그러한 인간의 자연환경(自然環境)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체적 인간의 특질을 '意志(manas)'로 파악하고, 객체적(客體的) 대상의 특질을 '법(法, dharma)'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크게 주목해야 한다.
이처럼 십이처설에서는 물질이 인간과 별개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즉, 물질은 인간을 통해서 철저하게 인식론적인 관점으로 파악해야 할 것인데,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III 불교에서 본 정신과 물질과의 관계
불교에서는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한 마디로 말해서 가히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항상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계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아니한 불일불이(不一不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不一不異에 대해서 살펴보면 물질과 정신은 완전히 하나가 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 불일(不一)의 뜻이다. 不一은 하나가 아니라는 뜻으로서 물질과 정신은 성질상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그 다음 불이(不異)는 물질과 정신이 완전히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완전히 분리된 관계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 서로 다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물질을 분류해야 하는데, 이에는 15종의 분류법과 11종의 분류법이 있다. 15종의 분류법은 11종의 분류법인 색(色), 오근(五根), 육경(六境)에서 색을 사대(四大)로 분류한 것이므로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
1. 십팔계(十八界)설에 나타난 정신과 물질과의 관계
(1) 오근(五根) : 5근은 인간의 인식기관을 말하는 것으로 5관이라고 하는데, 안근·이근·비근·설근·신근 등 5근은 정신의 의지처라는 뜻이 있으며, 또 마음이 활동하는 장소라는 뜻도 있다. 다시 말하면 5근은 육체의 구조를 의미하며 동시에 정신의 의지처가 되는 구실도 하는 것이며 넓은 의미에서 마음의 활동처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기관으로서의 구조를 가진 5근은 곧 육체를 말하는 것이며, 육체는 일종의 물체이기 때문에 물질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다만 한 육체를 5종으로 나누는 것은 인식 기관의 종류를 분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분류는 광대한 물체를 인식하는데는 매우 타당한 분류라고 생각된다.
(2) 육경(六境) : 6경은 객관세계의 인식대상을 여섯 가지로 나눈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경(境)은 마음이 닿는 경계를 뜻하며 마음이 닿는다는 것은 그 경계를 인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마음을 식(識)이라고 표현하며 식은 지(知)를 뜻하며, 요별(了別)의 작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마음은 5근에 의지하여 객관계의 대상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며, 그 대상의 종류를 5근에 의거하여 분류한 것이다. 즉 6경은 색경, 성경, 향경, 미경, 촉경, 법경을 말한다. 5근은 5경과 관련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인식활동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으로서 5근과 5경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5근은 반드시 마음이 의지하게 되며 따라서 5근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마음도 5종이 있는데, 이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이다. 법경(法經)은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을 말하며, 법경은 우리 마음을 주관하는 의식(意識)에 의거하여 인식되어지는 대상을 말한다. 법(法)은 물질계의 대명사인 색법(色法)과 정신계의 대명사인 심법(心法)을 총망라한 내용을 의미한다. 이러한 물질과 정신을 법경(法境)이라고 하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5경을 제외한 모든 인식의 대상은 법경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경은 미세한 물질계는 물론 마음속에 인식되는 영상(影像)들까지도 포함한다. 이러한 법경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마음을 의식(意識)이라고 한다. 유식론(唯識論)에 의하면 말나식(末那識)이라는 또 다른 마음을 의근(意根)이라고 정한다. 의식은 이 의근에 의지하여 물질계와 정신계에 나타나는 선과 악의 대상을 인식한다. 이러한 모든 것을 법경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의 인식활동 범위도 넓지만 법경의 범위는 더욱 넓은 것이다.
(3) 정신과 물질과의 관계 :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신과 물질계는 항상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시도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하면 육식(六識)이 육근(六根)에 의지하여 육경(六境)을 인식하는 관계에서 이 세 가지가 화합하면 행복하고 화목하게 된다. 만약 의식이 선정(禪定)과 같은 안정된 경지에 들어가 있다면 법경의 진리가 마음속에 진리롭게 잘 나타날 것이며, 의식과 법경이 화합이 잘 되어 고통이 없고 번뇌가 없는 열반의 경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의식과 법경이 화합이 잘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 인간의 행과 불행이 결정된다고 한다. 즉 마음과 몸과 객관계의 대상 등 세 가지가 잘 화합하여야 촉감을 느낄 수 있고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아무리 마음이 인식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물질계와 화합이 안되면 물질을 안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무지(無知)하게 되며, 번뇌와 고통을 야기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마음은 인식의 주체가 되는 것이고 물질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서 대상을 원만하게 인식하려면 피차가 화합이 잘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마음과 물질은 항상 관계를 갖고 있으면서, 그 관계의 내용이 어떠하냐에 따라 지식과 무지 그리고 행과 불행의 분별이 있게 된다.
IV 유식학의 물질관
유식을 비롯한 대승불교 이전의 부파불교 시대의 물질론은 불교의 물질론에 대한 기초를 닦아놓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오묘한 경지까지 연구하여 중생(衆生)들의 심안(心眼)을 열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물질론은 그 후 용수(龍樹)와 무착(無着)등 대승론사(大乘論師)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들이 저술한 논전(論典)에 부파불교의 물질론과 같은 내용들이 많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1. 부파불교(部派佛敎)의 색법
물질에 대한 종류(種類)는 이미 부파불교에서 그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 11종으로 확정하였다. 十一種은 眼根, 耳根, 鼻根, 舌根, 身根 등 五根과 色境, 聲境, 香境, 味境, 觸境 등 五根 및 無表色을 말한다. 이와 같이 11종으로 나누어 물질을 설명하는 이유는《品類足論》을 비롯하여《大毘婆沙論》등에서 자세하게 밝히고 世親이 저술한《俱舍論》에서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세친(世親)논사는 눈, 귀, 코, 혀, 몸, 뜻 등 육근(六根)의 자태가 정해지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육근(六根)가운데 안근(眼根)등 전5근은 오직 현재에 나타난 인식의 대상(現境) 만을 인식하기 때문에 먼저 배치하고 최종의 의식(意識)은 인식의 대상인 법경(法境)이 과거, 현세, 미래 등 삼세(三世)와 여러 무위법(無爲法) 등으로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최종에다 배치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전5근은 가장 그 확실성이 높고 우선되는 인식 작용을 하는 안근부터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의 순서로 배치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친논사는 11종의 색법을 정하고 또 부르는 순서에 대하여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색법은 유위법(有爲法)에 포함되는데, 유위법은 인연(因緣)이 화합(化合)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취집(聚集)의 뜻이 있고, 온적(蘊積)의 뜻이 있다. 집합하였다가 마멸되는 것을 유위(有爲)라 하는데, 이들 유위의 작용에 의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있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을 집약하여 하나로 묶어서 색온(色蘊)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색온을 시간적인 측면과 공간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불교의 물질론인 것이다. 유위법에 속하는 색법은 11종의 내용이 있으니 무상하게 생멸하며, 생멸하는 가운데 현재에 있는 물체는 정신을 보조하여 활동하게 하는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즉 심왕(心王)과 심소법(心所法)을 생장(生長)하게 하므로 생장(生長)의 뜻이 있고, 또 마음이 의지할 곳이라는 뜻으로 처(處)라 이름하기도 한다. 그리고 물질에 속하는 오근(五根)과 오경(五境)도 마음과 마음의 작용 등과 함께 한 가족이라는 뜻에서 계(界)라 하며 이를 종족이라고도 해석한다. 다시 말하면 6근과 6경 그리고 6식(識)등을 합쳐서 십팔계(十八界)라고 하는데, 이들 마음과 육체 그리고 객관계의 물질을 모두 종족이라 칭한다. 이와 같이 마음과 물질이 종족관계와 같이 불가분리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면 종족의 뜻과 생본(生本)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세친논사는 《구사론》에서 色·受·想·行·識 등 오온(五蘊)은 유위에 攝하며 조작된 것이며 微細한 법이라 할지라도 한가지 인연으로 생겨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하였다. 이는 물질과 정신이 서로 필요불가결하여 상부상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2. 유식학(唯識學)의 물질론
구사론에서 이미 마음과 물질이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물질과 정신이 서로 상부상조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起信論》에서 물질과 정신은 둘이 아니다(色心不二)라는 뜻과도 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物心의 내면에는 무한한 진리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모든 것을 法이라 칭한다. 법에는 心法과 色法이 있으며, 心法을 도와주면서 따로 형상을 나타내고 있는 色法은 전 자연의 물질계를 대표한다. 무착보살은 《아비달마집론》에서 물질계를 대표하는 색법은 5근과 5경의 十處를 십색계(十色界)라 하고, 이에 法處(法境, 法界)의 1종을 추가하여 색법의 수를 모두 11종으로 정하고 있다. 그러면 七識界라고 불리는 六識(眼·耳·鼻·舌·身·意識)과 意根인 의계는 어디에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런데 이 7식계는 法境인 法處에 모두 포섭되는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무착보살은 十一種의 색법에 四大를 더하여 十五種으로 분류하여 말하기도 한다. 4대는 물체를 조성하는 원리가 되고 원인이 되며, 이들 四大에 의하여 조성되어진 결과가 十色處인 것이다.《瑜伽師地論》권53에서도 11종의 색법을 10색처와 법처소섭색으로 나누어 그 自性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 색법은 能造의 4종과 所造色으로 나뉘어지며, 四大種은 모든 물체를 능히 조성하는 能造의 원리라 하고 소조색은 四大에 의해 조성된 五根과 五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 물체는 모두 變?相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 변애상이라는 말은 물체는 변천하는 것이며, 서로 장애하는 성질과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미륵보살은 색법의 종류를 11종으로 하고 있으며, 그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 무착보살의 色法觀이라고 할 수 있고, 그 후에 이 사상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분이 세친논사라고 할 수 있다. 세친은 구사론에서도 이미 물질의 종류를 11종으로 발표한 바 있지만 대승불교에 귀의한 후 《大乘百法名門論》에서도 5근과 5경 그리고 법처소섭색 등 11종의 색법으로 확정하고 있다.
3. 유식학의 물질 분류법의 독특성
유식학이 물질을 11종으로 한 것은 인식론적인 분류법에 의거해서 정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이 오관(五官)을 통하여 객관계의 물질을 인식할 때, 제일 먼저 몸의 구성기관인 5근에 의지하게 되므로 우선적으로 마음의 의지처인 5근을 헤아리게 되었더 것이다. 그리고 안근(眼根)을 통하여는 色境을 인식할 수 있고, 이근(耳根)을 통하여는 향경을 인식할 수 있으며, 비근(鼻根)을 통하여 향경(香境)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설근(舌根)을 통하여 미경(味境)을 인식할 수 있으며, 신근(身根)을 통하여 촉경(觸境)을 인식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마음은 5근에 의지하여 5근의 영역인 5경만을 인식할 수 밖에 없으므로 5근을 통한 인식의 대상만을 물질의 종류로 헤아리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물질계가 광범위하고 삼라만상의 차별이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5근을 통하여 인식할 때, 5경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보다 미세한 물질계와 정신(情神)의 색은 모두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에 포함시켜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법처소섭색은 가히 볼 수 없는 것과 가히 대할 수 없는 모든 진리까지도 여기에 포섭한다는 뜻을 지지고 있다. 이러한 법처소섭색이 아무리 심오하고 깊이있는 진리의 성질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지혜(智慧)에 의하여 인식되어지는 대상인 것이다. 부정한 망식(妄識)이 물체의 경(境)을 상대하여 인식하고 또 청정한 지혜는 진여(眞如)의 경(境)과 화합하여 심일경성(心一境性)의 경지에서 인식하게 된다. 심일경성은 마음(心)이 일경(一境)에 안주(安住)하여, 객관과 주관이 없는 절대의 경지에서 서로 화합하여 인식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물체에 대한 분류는 인식하는 마음의 의지처인 5근에 의거하여 분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유식학의 八識說을 통해서 본 정신과 물질과의 관계
이번에는 유식의 8식설을 중심으로 인식과 인식대상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살펴 보도록 하겠다. 인식대상을 소연경(所緣境)이라고 하는데, 소연경이란 반연(攀緣)되어지는 대상이라는 뜻이다. 또한 반연하고 인식하는 주체는 심식(心識)이다. 심식은 인식[了別]하는 것을 성질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인식할 대상을 요구하고 또 찾게 된다. 그러므로 심식은 항상 능동적인 입장에 있으며, 인식되어지는 대상은 또 수동적인 입장에 있게 된다. 따라서 심식을 능연(能緣)이라 하고, 인식의 대상을 소연(所緣)이라 한다. 이와 같이 심식과 소연경은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에 있으며 심식은 주관의 입장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로 공존의 의미가 있는 것이며 주관이 없는 객관이 있을 수 없고, 객관이 없는 주관이 있을 수 없다. 이제 심식과 소연경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안식(眼識)의 소연경(所緣境) : 안식은 색경(色境)을 인식한다. 색경의 본질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대 중에서 지대(地大)의 세력이 강하면 육지와 같은 고체의 물체가 되고, 또 수대(水大)의 세력이 강하면 바닷물과 같은 액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화대(火大)의 세력이 강하면 물질의 동력이 되며 바람과 같은 풍력(風力)도 생기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상과 같이 사대는 물질의 성질로서 무형의 성질이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 표면화 될 때, 유형의 물질이 된다. 유형의 물질을 상대하여 사는 범부들은 안식(眼識)을 통하여 유형의 색경(色境)을 대할 때, 그 색경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인식하게 된다. 즉 청(靑)·황(黃)·적(赤)·백(白) 등의 현색(顯色)과 장(長)·단(短)·방(方)·원(圓) 등의 형색(形色)으로 나눈다.
(2) 이식(耳識)의 소연경(所緣境) : 이식의 소연경은 성경(聲境)이다. 다시 말하면 소리를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것이 이식으로서, 그 소리는 동물의 소리와 물질의 소리로 크게 나누어 설명한다. 동물의 소리는 소리의 내용은 다르지만 대체로 음성이 있다고 본다. 이는 이미 집수된 바 있는 종자를 원인으로 하여 감정이 있는 동물의 소리를 발성한다는 뜻에서 유집수대종위인(有執受大種爲因)이라 한다. 그리고 물질에 의하여 나타내는 소리는 동물과는 달리 감정이 없기 때문에 무집수대종위인(無執受大種爲因)이라 한다.
(3) 비식(鼻識)의 소연경(所緣境) : 비식의 소연경은 향경으로서 이는 여러 냄새를 총칭한 말이다. 좋은 냄새(好香)가 있고 나쁜 냄새(惡香)가 있다. 그 냄새들은 육체에 알맞는 유익한 냄새(等香)가 있고 육체에 맞지 않고 건강에 피해를 주는 불이익의 냄새(不等香)가 있다. 이들 냄새들은 모두 비식에 의하여 식별된다.
(4) 설식(雪蝕)의 소연경(所緣境) : 설식의 소연경은 미경(味境)이다. 미경은 달고(甘), 시고(酢), 짜고(鹹), 맵고(辛), 쓰고(苦), 싱겁고(淡)하는 등 맛에는 이들 여섯 가지 맛이 가장 기본적이라고 본다. 이 여섯 가지 맛에서 여러 가지 맛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며, 그 밖의 맛은 이에 준하여 생각하면 될 것이다.
(5) 신식(身識)의 소연경(所緣境) : 신식의 소연경은 촉경(觸境)이다. 신식은 몸으로 감촉하여 식별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도 몸에 닿음으로써 인식 되어진다.
(6) 제6의식(第六意識)의 소연경(所緣境) : 제6의식의 인식 대상을 보면 제6의식은 물질계와 정신계를 가리지 않고 모든 대상을 다 인식하는 심식이다. 그러므로 인식의 범위가 가장 넓으며 이 범위를 모두 합쳐 법경(法境)이라고 한다. 이 때의 법은 유형(有形)의 것과 무형(無形)의 것을 총망라한 말이다.
(7)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의 소연경(所緣境) : 다음 제7말나식의 소연경을 보면 말나식은 항상 제8아라야식(第八阿賴識)의 견분(見分)만을 인식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아라야식을 평등하게 반연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실아(實我)의 집착을 나타내어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번뇌만을 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라야식의 견분(見分)이라는 말은 각 심식의 내용과 역할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사분설(四分說) 가운데의 하나를 말한다. 즉 견분은 각 심식의 핵심적인 인식 작용으로서 그 활동의 작용을 착각하여 집착을 야기한 것이 곧 말나식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심성 내부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아라야식을 상대로 하여 망상을 야기하는 심식이 곧 말나식이다.
(8) 제8아라야식(第八阿賴耶識)의 소연경(所緣境) : 다음 제8아라야식의 소연경을 알아보기로 한다. 아라야식의 소연경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아라야식 내에 보존된 종자(種子)를 반연하며 둘째는 자신을 둘러싼 육체[五根]를 소연경으로 하고 있다. 셋째는 인간이 몸 담고 사는 객관세계를 반연하여 인식하고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들 세 가지 내용을 좀 더 설명하면, 아라야식은 칠전식(七前識)의 활동과 육체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인 종자를 자체내에 보존하는 장식(藏識)으로서 그 종자를 항상 반연한다. 다음 육체는 곧 안근(眼根) 등 오근(五根)을 뜻하며 이들 오근을 반연하여 그 오근이 안전하거나 위태로움의 운명을 함께 하면서 꾸준히 유지시켜주는 주체가 곧 아라야식이다. 또한 아라야식은 객관세계인 기세간(器世間)을 상대로 반연한다는 것이다. 기세간이 하나의 물체로서 큰 덩어리인 천체이지만 실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안에 있는 존재로서 아라야식이 유지시켜 주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유식학의 입장이다. 마음 밖에 따로 경계가 없으며[心外無境], 만법은 오직 심식에 의하여 존재한다[萬法唯識]는 말에서 그 진리를 알 수 있다.
< 결 론 >
위에서 불교가 정신 못지 않게 물질에 대한 풍부한 교설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불교는 물질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정신의 독자성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에 물질보다는 정신쪽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인간관이 정신적 측면만을 절대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특히 유식학을 정신만을 강조하는 관념론으로 간주하는 것은 더 큰 오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의 존재가 물질적 측면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 불교 전체의 기본적인 입장이며, 유식학도 이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물질적인 측면을 심각하게 인정하기 때문에 인간을 고(苦)의 덩어리라고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인간의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물질에 대해서 파악해야 했으며, 그 결과 이러한 물질의 세계가 정신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밝혀내게 되었다.
올바른 세계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물질의 조화되는 증득(證得)의 상태를 이룸으로써 가능한 것인데, 이는 마음의 안정을 통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정중의식(定中意識)을 실현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 참고문헌 -
1.『佛敎의 物質과 時間論』, 吳亨根著, 瑜伽思想社, 서울: 1994
2.『유식학 입문』, 오형근著, 불광출판부, 서울:1997
3.『佛敎學槪論』, 東國大學校 出版部, 서울: 1994
4.『불교강좌편』, 정승석 지음, 대원정사, 서울: 1994
5.『아비달마의 철학』, 사쿠라베 하지메, 우에야마 순페이, 정호영 譯, 민족사, 서 울: 1993
6.『俱舍學』, 金東華著, 東國大學校 釋林會, 서울: 1982
7. 『佛敎의 宇宙觀』, 定方晟著, 東峰譯, 진영출판사, 서울: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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