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과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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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서 과연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깨달음을 얻고 나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깨달았다는 것을 본인이
스스로 알 수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확인을 해줘야 하는 것인지?
깨달음에 단계가 있는지 아니면 한 번 만에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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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성도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맛지마 니까야 마하삿짜까 경(M36)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누진통으로 표현되는 사성제를 깨달으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숫따니빠따에서는 어떤 바라문이 왜 당신이 부처(깨달은 사람)이냐라는 질문에 역시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부처라고 답하고 있습니다.(Sn. 558게송)
깨달음을 얻고 나면 탐진치로 대표되고 번뇌니 속박이니 장애니 격류니 잠재성향이니 하는 술어로 표현되는 모든 불선법들(해로운 심리현상들)의 뿌리가 뽑히고 통찰지(지혜)가 완성됩니다. 그래서 여러 경들은 “그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惱]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존재의 번뇌[有惱]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무명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해탈에서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습니다.”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라고 여러 경들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확인해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은 탐진치로 대표되는 불선법이 뿌리뽑히고 통찰지가 현전하기 때문에 몸과 말로 하는 그의 행동을 보고 주위에 있는 수행자들이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다고 상좌부 스님들은 말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불법승계에 대한 “움직이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그가 원하기만 하면 ‘나는 지옥을 부수었다. 나는 축생의 모태를 부수었고, 아귀계를 부수었으며, 나는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를 부수어서 흐름에 든 자[預流者]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었다.’라고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D16 등)
초기경에는 사람의 성향이나 수행정도에 따라서 바로 아라한이 되는 경우도 나타나고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등을 거쳐서 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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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고 녹야원에서 초전법륜을 하실 때, 무슨 내용을 다섯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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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전법륜경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중도인 팔정도를 깨달으셨다고 하셨으며 다시 사성제를 설하고 계십니다.
초기경들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깨달을 것이며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1. 사성제의 철견, 2. 8정도의 실천, 3.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함, 4. 12연기의 순관/역관 등을 통해서 라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사성제의 도성제는 8정도이며 8정도의 정견의 내용은 사성제와 12연기를 아는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으며 사성제의 고성제는 오온(오취온)을 본질로 합니다. 12연기의 순관은 4성제의 고성제와 집성제와 일치하고 역관은 멸성제와 도성제와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4제/8정도/오온/12연기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그 궤를 같이합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상황과 듣는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서 깨달음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셨지만 그 내용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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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고 초기불교 입장에서 대승불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어떠한지도
궁금합니다. 이를테면, 대승비불설 등에 대해서......... 근기에 맞게
설명하기 위해서 같은 내용을 다양하게 여러가지 경전을 통해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각색이 너무 심하다 싶은
부분들이 많다고 생각하기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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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사람의 입장이나 관점에 따라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관계는 판이하게 다르게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불교의 주흐름은 초기불교-아비담마/아비달마-반야중관-유식이라고 봅니다. 이들 가르침은 법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승 가운데서도 반야중관과 유식의 가르침은 각론으로 들어가면 다른 부분이 많겠지만 법을 중시하는 근본입장은 같다고 봅니다. 대승불교 가운데서 여래장 계열의 경론들은 믿음을 중심한 체계이고, 자칫 존재론적인 실체가 오온의 배후나 내부에 존재하는 듯한 언어표현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조심해서 봐야할 체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충 간략하게 저의 소견을 적어봤습니다. 올리주신 질문에 조금의 답변이라도 되었으면 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각묵 합장
=== 이상은 각묵 스님의 글 ===
십이(12)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集)하며, 또 멸(滅)할 수 있는가를 밝혀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라는 것은 앞 절에서 논한 바와 같다. 이러한 고온(苦蘊)의 집(集)과 멸(滅)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본격적인 실천적 교설을 학계에서는 사성제(四聖諦) 또는 줄여서 사제(四諦)의 교설이라고 보고 있다.
諦(satya)라는 말은 <제>로 읽는데, 사실(事實,fact)·진리(truth) 등을 나타낸다. 그러한 제(諦)로서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사성제(四聖諦,catur-arya-satya)라고 부르는 것이다. "네 가지 성제(聖諦)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 가. 괴로움·괴로움의 집(集)·괴로움의 멸(滅)·괴로움의 멸(滅)에 이르는 도(道)의 네 가지 성제(聖諦)가 곧 그것이다."<잡아함 卷 15>
"뭇 교설은 사성제(四聖諦)로 집약된다."<중아함 卷7 상적유경>고 말해질 정도로 중요시되는 이 사제는 이제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가를 살펴보자. 첫째, 괴로움의 성제(聖諦)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것이 고성제(苦聖諦)인가. 생하고(生)·늙고(老)·병들 고(病)·죽고(死)·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求不得)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卷7 분별성제경>
이 여덟 가지 괴로움은 삼법인설(三法印說)에서 충분히 밝혔던 것이므로 여기서 다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生)·노사(老死)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苦蘊: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성제(聖諦)는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직지하고 있다.
둘째,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 고 있다. 즉 오온에 대한 '탐애(愛貪,chanda-raga)' <잡아함 卷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 (punar-bha-vika)" 희탐(喜貪,nandi-raga)을 수반하고 이곳저곳에 락착(樂着,abhinandin)하는 애(愛,trsna)"<잡아함 卷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色)은 희애(愛喜)가 그 집(集)이고, 수(受)·행(想)·행(行)은 촉(觸)이, 식(識)은 명색(名色)이 그 집(集)이 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卷2> 괴로움의 집(集)을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苦聖諦)에서 여덟 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하였기 때문일 것 이다. 그러나 집(集)이라는 개념의 최승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집(集,samudaya) 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한다(udaya)'는 뜻으로서, '모은다(collect)'는 뜻이 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緣起)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 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집(集)이 이렇게 연기에 통하는 개념이라면,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둘째 번 성제(聖諦)는 괴로움은 연기(緣起) 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또 그것은 괴로움의 성제(聖諦)와 함 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셋째, 괴로움의 멸(滅)이라는 성제(聖諦)는 집제(集諦)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滅諦)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 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 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의 멸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멸(滅,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 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聖諦)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 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넷째, 괴로움의 멸(滅)에 이르는 길(道)이라는 성제는 경전에 팔정도(八正道)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여덟 가지 실천사항을 가리킨다.
=== 서재영의 교리강좌에서 발췌한 글 ===
연기법은 붓다가 처음으로 깨달으신 진리이고, 사성제는 붓다가 최초로 가르쳐 주신 진리이다. 한편 삼법인(三法印)은 부처님께서 일생 기치(旗幟)처럼 내 거신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법인(法印)이란 진리의 도장, 즉 진리로서 확인함이란 뜻이며 나아가 그것을 널리 드러내어 알린다는 뜻이다.( 윤영해 교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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