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8일 오전 6:39 |
신불교유신론-2
200년 기독교가 1,700년 불교를 압도한 연유-상(上)
도시의 어느 집에서든 밤에 창문을 열면 붉은 십자가가 스무 개 이상 들어온다. 하늘엔 별, 지상에 십자가다. 대통령부터 장차관과 판검사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힘깨나 쓴다는 자들은 대개 교회에 다닌다. 불교계의 최고 수장인 총무원장이 일개 경찰에게 검문 수색을 당하였는데, 대통령은 목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200년을 갓 넘어선 기독교가 어떻게 1,700년 역사를 가진, 얼마 전만 하더라도 2천 만 명 이상의 신도를 거느린 불교를 압도하고 주력종교로 부상하였을까.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 원인을 따져보아야 불교의 대안도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흐름과 제국주의적 침략을 무시할 수 없다. 20세기는 현대 과학기술과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서양이 동양을 지배한 역사였다. 세계사는 신의 정당성 여부가 아니라 그를 믿는 사람의 힘의 크기가 신의 힘을 좌우하였음을 보여준다. 곧, 그를 믿는 집단의 힘만큼 신 또한 힘을 갖는다. 여기에 제국주의의 체계적인 침투가 더해지면서 기독교는 점점 동양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시조창을 하는 할아버지에게 MP3를 팔 수 없다. 그의 손자라도 팝송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 서양은 동양인의 사고와 가치부터 바꾸기 위하여 그 첨병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그 이후엔 서양의 대중문화를 들이밀었다. 어느새 미국인의 생활양식(American way of life)은 한국인의 보편적인 생활양식이 되었으며, 한국 어린이는 미국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꿈을 꾼다. 꿈의 양식(American way of dream)마저 서구화한 것이다.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영화, 드라마, 소설에는 은근하든 노골적이든 기독교 사상이 깔려 있다. 우리는 서양의 문화에 접하며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한국은 자발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유일한 나라다. 한국인의 영성이 풍부하고 새로운 가치관에 대한 호기심이 지대한 점도 왜 작용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대중들 다수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유는 ‘기독교=서구화=근대화’였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주술의 정원’에서 곧 바로 일탈하여 근대적 합리성과 결합하였다. 합리성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다시 해석하였다. 이런 기독교가 한국에 수용되면서 한국 대중은 기독교와 근대화를 동일시하였으며, 서양의 선교사와 성직자가 근대적 계몽을 선도하였다. 모던 보이와 걸들은 성경을 끼고 예배당으로 향하였고 선교사들이 강의하는 학당으로 달려갔으며, 곧 이 나라의 엘리트가 되었다.
기독교는 자본주의와도 발 빠르게 결합하였다. 성경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를 타고 바늘귀를 지나는 것처럼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자본주의와 부합할 수 있었을까. 기독교도들은 중세 말기에 부자가 갈 수 있는 곳으로 연옥을 설정하였다. 이로 부자는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연옥으로 갔다가 다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직업이 바로 신이 정해준 ‘소명’이기에 그 직업에 충실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은 신의 소명을 잘 받드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터부시되던 부의 축적이 외려 신으로부터 구원받는 길이 된 것이다. 막스 베버가 잘 통찰한 대로 이후 정당성을 갖게 된 자본주의는 획기적인 발전을 하였다. 미국으로부터 유입된 개신교는 60년대 이후 진행된 한국의 비약적인 자본주의화와 결합하였다. 이후 “교회를 다녀야 출세를 하고 돈을 번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기독교의 폭발적인 확산을 가져왔다.
200년 기독교가 1,700년 불교를 압도한 연유-상(上)
도시의 어느 집에서든 밤에 창문을 열면 붉은 십자가가 스무 개 이상 들어온다. 하늘엔 별, 지상에 십자가다. 대통령부터 장차관과 판검사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힘깨나 쓴다는 자들은 대개 교회에 다닌다. 불교계의 최고 수장인 총무원장이 일개 경찰에게 검문 수색을 당하였는데, 대통령은 목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200년을 갓 넘어선 기독교가 어떻게 1,700년 역사를 가진, 얼마 전만 하더라도 2천 만 명 이상의 신도를 거느린 불교를 압도하고 주력종교로 부상하였을까.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 원인을 따져보아야 불교의 대안도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흐름과 제국주의적 침략을 무시할 수 없다. 20세기는 현대 과학기술과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서양이 동양을 지배한 역사였다. 세계사는 신의 정당성 여부가 아니라 그를 믿는 사람의 힘의 크기가 신의 힘을 좌우하였음을 보여준다. 곧, 그를 믿는 집단의 힘만큼 신 또한 힘을 갖는다. 여기에 제국주의의 체계적인 침투가 더해지면서 기독교는 점점 동양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시조창을 하는 할아버지에게 MP3를 팔 수 없다. 그의 손자라도 팝송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 서양은 동양인의 사고와 가치부터 바꾸기 위하여 그 첨병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그 이후엔 서양의 대중문화를 들이밀었다. 어느새 미국인의 생활양식(American way of life)은 한국인의 보편적인 생활양식이 되었으며, 한국 어린이는 미국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꿈을 꾼다. 꿈의 양식(American way of dream)마저 서구화한 것이다.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영화, 드라마, 소설에는 은근하든 노골적이든 기독교 사상이 깔려 있다. 우리는 서양의 문화에 접하며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한국은 자발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유일한 나라다. 한국인의 영성이 풍부하고 새로운 가치관에 대한 호기심이 지대한 점도 왜 작용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대중들 다수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유는 ‘기독교=서구화=근대화’였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주술의 정원’에서 곧 바로 일탈하여 근대적 합리성과 결합하였다. 합리성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다시 해석하였다. 이런 기독교가 한국에 수용되면서 한국 대중은 기독교와 근대화를 동일시하였으며, 서양의 선교사와 성직자가 근대적 계몽을 선도하였다. 모던 보이와 걸들은 성경을 끼고 예배당으로 향하였고 선교사들이 강의하는 학당으로 달려갔으며, 곧 이 나라의 엘리트가 되었다.
기독교는 자본주의와도 발 빠르게 결합하였다. 성경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를 타고 바늘귀를 지나는 것처럼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자본주의와 부합할 수 있었을까. 기독교도들은 중세 말기에 부자가 갈 수 있는 곳으로 연옥을 설정하였다. 이로 부자는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연옥으로 갔다가 다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직업이 바로 신이 정해준 ‘소명’이기에 그 직업에 충실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은 신의 소명을 잘 받드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터부시되던 부의 축적이 외려 신으로부터 구원받는 길이 된 것이다. 막스 베버가 잘 통찰한 대로 이후 정당성을 갖게 된 자본주의는 획기적인 발전을 하였다. 미국으로부터 유입된 개신교는 60년대 이후 진행된 한국의 비약적인 자본주의화와 결합하였다. 이후 “교회를 다녀야 출세를 하고 돈을 번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기독교의 폭발적인 확산을 가져왔다.
출처 : 책을 좋아하는 사람
글쓴이 : 연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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