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결집은 라자그리하(Rājagṛha)에서 500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경장과 율장을 편찬하였다. 그래서 500결집, 또는 500집법(集法)이라고도 부른다. 붓다가 세상을 떠날 당시에 이미 교단의 세력은 매우 융성했기 때문에 출가자의 수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 뛰어난 제자들 500명만이 비바라(Vivara) 산의 칠엽굴(七葉窟)에 모여서 결집을 단행했다. 결집 모임을 이끌었던 상좌는 마하카쉬야파였고, 아난다가 먼저 암송하면 모두 따라 합송하는 형식으로 완성하였다. 특히 아난다는 교리 부분을 암송한 반면에, 계율 부분은 우팔리(Upāli)가 선창을 담당했다고 전한다.
제2차 결집은 기원전 383년경에 이루어졌다. 이 결집은 바이샬리(Vaiśālī) 결집 또는 700결집, 700집법(集法)이라고도 불린다. 붓다의 입멸 후 100년경, 아난다의 제자였던 야사(耶舍, Yaśa) 비구는 바이샬리의 브리지(vṛji)족 출신의 비구들이 계율에 위반되는 열 가지를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700명의 비구들을 바이샬리에 소집하여 그러한 열 가지에 대해 심의했다.
그 때 회의에서는 열 가지의 사안, 즉 '10사(事)'가 옳지 않은 일이라고 부정되고, 그것의 실행자를 이단이라고 간주하였다. 하지만 팔리 율장에서는 10사를 심의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스리랑카의 왕통사(王統史)인 『도사 Dīpavaṃsa』와 『대사 Mahāvaṃsa』는 이 심의 다음에 성전의 결집을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 때의 일을 제2차 결집이라고 부른다. 그 당시에 논의되었던 열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염사정(鹽事淨): 그 전날 받은 소금을 비축해 두었다가 식사 때 쓰는 것은 정법(淨法)이다.
둘째, 이지정(二指淨): 중식(中食)을 먹은 뒤에라도 해 그늘이 두 뼘 길이가 될 때까지는 먹을 수 있다.
셋째, 수희정(隨喜淨): 밥을 먹은 뒤에라도 다시 또 먹을 수 있다.
넷째, 도행정(道行淨): 도량을 떠나서는 먹은 뒤에 다시 식사할 수 있다.
다섯째, 낙장정(酪漿淨): 소유(酥油), 밀(蜜), 석밀(石蜜) 등을 낙(酪)에 타서, 밥을 먹지 않을 때 먹을 수 있다.
여섯째, 치병정(治病淨): 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술이 되기 직전 상태의 음료는 마실 수 있다.
일곱째, 좌구정(坐具淨): 몸이 크고 작음에 따라 좌구, 즉 방석의 크기를 조정할 수 있다.
여덟째, 구사정(舊事淨): 그 이전 사람이 하던 일을 따라 하면 율에 위반되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
아홉째, 고성정(高聲淨): 따로 갈마법(羯磨法)을 짓고 나중에 와서 억지로 다른 이의 용서를 구한다.
열째, 금보정(金寶淨): 금, 은, 돈 등을 보시 받을 수 있다.
이상의 열 가지가 모두 정법이므로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던 이들에 대해서, 결집을 통해서 모두 비법(非法)이라고 결의하였던 것이다. 다만, 아난다의 직제자로서, 그 당시 법랍 120년에 이르던 최고의 장로 사르바카마는 아홉 가지는 비법(非法)이지만, 구사정(舊事淨)은 경우에 따라 인정할 수도 있다고 판정하였다고 전한다.
이로써 그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분분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더욱 더 첨예한 대립을 낳았고, 분파를 야기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제1차 결집은 단순히 경과 율의 결집이었으나, 제2차 결집은 율에 대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상 차이가 난다.
제3차 결집은 불법을 널리 펴던 아쇼카 왕이 즉위 17년째 되던 해,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Pāṭaliputra)에서 목갈리풋타팃사(Moggaliputtatissa)의 주도로 1000명의 비구를 소집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이를 가리켜 1000인 결집, 또는 화씨성 결집, 1000인 집법(集法) 등으로 부른다.
제3차 결집에서는 인도 자체와 스리랑카 등의 외국에 정통 교의를 전하는 성전을 편찬했으며, 논서들을 논장(論藏)으로 집성함으로써 비로소 삼장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삼장을 편찬하는 데 총 9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특히 목갈리풋타팃사는 별도로 『논사 論事 Kathāvatthu』를 지어서 그릇된 견해를 논박했다. 이러한 사실은 남전(南傳)의 율장(律藏)이나 『대사』와 『도사』 등에 기록되어 있다.
제4차 결집은 서북 인도를 지배하던 카니슈카(Kaniṣka, 재위 73~103) 왕 시대에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을 편집했던 일을 가리켜 제4차 결집이라 말한다. 카니슈카 왕은 아쇼카 왕에 비견될 만큼 불교를 후원하는 데 아끼지 않았던 인물로서 불교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현장(玄奘) 스님이 번역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발 跋」에 의하면, 제4차 결집은 붓다의 입멸 이후 400년경에 카슈미르(Kaśmīra)의 환림사(環林寺)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제4차는 파르슈와(Pārśva) 존자가 카니슈카 왕에게 건의하여 후원을 받아내서 삼장에 정통한 500명의 비구들을 소집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그 때 집대성된 문헌이 총 30만 송(頌) 660만 언(言)에 달하는 대주석서 『아비달마대비바사론 阿毗達磨大毘婆沙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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