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iN에서 >
태권도 단수에 비유해서 설명을 하자면........
초단은 ( 영원한, 고정된 ) 초단이 아니니까, 홍띠가 흑띠인 초단이 될 수 있고,
다시 초단이 2단, 3단, 4단...이 될 수 있다.
즉, 초단이 영원한 초단이라면, 초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초단은 초단이 아니다. 그렇기에 초단이다.
A는 A가 아니니, 그 이름이 A이다
[지금] 초단은 [항상] 초단이 아니니, [임시적으로] 그 이름이 초단이다
늘 변하는 어제의 나는 고정된 오늘의 나가 아니다. 그래서 나라고 부른다.
오늘의 그대는 어제의 어린아이가 아니라 청년이다 . 그리고 내일이면 노인이다.
그대는 그대가 [어린아이나 청년이나 노인이] 아니다. 그 이름이 그대다
고정된 그대는 없다는 거죠.
==> 무상하다. 항상 변한다. 고정된 실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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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不生亦不滅)
영원한 것도 없고 단절된 것도 없다. (不常亦不斷)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不一亦不異)
오는 것도 없고 나가는 것도 없다. (不來亦不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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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명제가 아닌, 선언입니다.
A=A라는 시각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한 것인데요. 이것은 자기동일성을 의미합니다.
즉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다... 라는 뜻이지요.
A=A라는 것을 선언에서 명제로, 즉 증명 가능한 영역으로 이끌기 위해,
더이상 쪼갤 수 없어서, 더이상 변하지 않는 물질의 근원에 대한 탐색이 시작하게 됩니다.
분자와 원자가 이러한 이유로 발견된 것이지요. 물론 한참 후의 일이지만요.
물질적으로 입자의 근원을 찾듯이, 인간의 본성에도 이러한 것이 있으리란 생각으로 파고들어가는데,
이게 고대 그리스철학의 기반입니다. 완벽해서 변하지 않는 그 무엇..... 플라톤의 이데아가 떠오르지 않나요?
그래서 서양의 철학은 철저하게 선언된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즉 변하지 않는 영원불멸의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죽어서 그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동양, 적어도 서양에서 바라본 동쪽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일단 공자를 보면, 논어 학이편 제일이 학이시습입니다. 이것은 공자의 인간관, 또는 우주관을 내포하고 있는,
그래서 논어 전체를 아우르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이시습은 배우고, 때 맞게 익힌다는 뜻입니다.
배움이란 모름에서 앎으로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즉 A=A가 아니라, 무지한 나와 배워서 아는 나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배움이란 옳은지 그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습, 즉 실천을 통해 증명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역시나 그것을 습, 실천하기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전후의 다름에서 오는 것이야말로 삶의 기쁨이라고 공자는 역설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보면 배움은 나와 나를 둘러싼 주변, 즉 우주와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관계란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지요.
즉 내가 우주와 연결되어 있을 때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이 학이의 세번째 문장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와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 그것인 사회적인 외로움을 뜻할지언정,
우주적으로 외롭지 않다는 부연인 것입니다.
즉 공자는 A=/A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A=A일때 기쁜 것이 아니라, A=/A일때 기쁘다는 것이지요.
불교의 제행무상 역시 같은 맥락이 있습니다.
무상이란 항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무작위적으로, 우연이 난립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인과적으로, 연기적으로 변한다는 것이 불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연기적으로 변한다는 것, 원인과 결과의 꼬리를 물고 변한다는 것은 주변과 관계한다는 뜻입니다.
즉 본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본성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딱 꼬집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세상에 딱히 나 아니라고 할 만한 것 역시 없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A=A가 아니고, 그 이름이 A라는 것이 이 동양과 서양의 시각을 합쳐 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합쳐야 하는 이유는, 서양의 문물이 앞서감에 따라 동양에 살면서,
도양적 정서를 가진 사람이 서양적 학문을 닦으며 생기는 간극을 좁히기 위한 도식적 설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우리의 정서는 나보다 부모님이나 친구들간의 관계를 중시합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A=A라고 배우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둘은 동떨어져 있어서
별 상관 없어보이지만, 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관계를 중요시 하는 세대와,
나의 욕구가 더 중요한 세대간의 차이는 이미 좁힐 수 없을만큼 크니까요.
또한 우리는 은연중 A=A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어제의 내가 지금의 나고,
내일 역시 나는 나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삶을 통찰하지 않고, 생존이라는 물결에 떠내려가는 존재로서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우리는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 이것이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중국사람들은 "행(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行이란 두 다리가 걸어가는 모양인데, 왼발이 걷기 위해서는, 오른 발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역시나 오른발도 왼발을 의지해야만 걸음을 걸을 수 있지요. 이렇게 우리는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그렇게 타를 의존하는 동시에 타 역시 나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완전무결한 A=A로서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왼 발이 없으면 오른발도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인과적인 존재로서 원인이 없으면 A역시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이라는 기간 동안 A=A인것처럼 착각을 하고 삽니다. 즉 본성이 A=A가 아닌, 우리의 편의상 그렇게 이름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짓는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것이,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내게로 와서 꽃이 되는 것이지요. 즉 우리는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래의 의미, 즉 본성은 인간이 이름을 지어주느냐 마느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바위는 우리가 바위라고 부르지 않고 장미라고 불러도 바위의 본성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름짓는 것은 인간중심적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는데 도움을 줄 뿐, 그 본래의 성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참고로 동양의 사상, 인도나 중국의 중용(천명지위성), 노장사상(도가도비상도), 공자사상(학이시습)은 대부분 공통적인 맥락이 있습니다. 직접 음미해 보시는 것도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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