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안정을 추구하는가? 변화를 추구하는가?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추구하는가? 자신의 상식에 어긋나는 언행을 해야 할 때, 자신의 가치관에 틀린 행위를 해야 할 경우, 사람은 망설이게 된다. 고민하게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상대방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지 못 하게 된다. 이런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되면 누구나 다 고민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계획을 덮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계획을 짜야 한다면, 이게 맘에 드는 건가, 수가 틀린 건가? 살아가다보면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생각했던 대로 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지혜로울까? 그 갑작스런 환경변화를 쉽게 수용을 해야 하나? 끝까지 거부해야 하나? 전자는 지금까지 계획을 한 순간 헌신짝처럼 버려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하고, 후자는 상황변화에 대응하는 태도가 너무 융통성이 없어보일 수도 있고, 자기의 의지(고집?)가 강함을 내보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게 된다면 신중하게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쉽게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 다른 사람이 변화를 거부한다면, 내가 따라야 하나 그래도 나의 상황과 논리에 따라 바꿔야 하나? 바꾸긴 바꿔야 겠는데, 지금까지 해온 약속을 한 순간에 뒤집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긴다. 이것이 맘에 걸려, 갈등이 생긴다.
사바세계에서 사는 중생의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라고 한다. 이 고통을 멸하고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즉, 고집멸도 사성제와 연기법을 제대로 깨달아서 열반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한다. 고요함, 평온한 마음을 가지려면 이런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팔정도를 깨달음에 이르는 수단으로 삼고, 육바라밀을 수행함으로써 니르바나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어느 세월에 ...........
몇 겁의 생을 수행자로 살아야만 고요함, 적멸에 이를 수 있을까?
재가 불자가 하는 좌선, 참선은 쉽지 않다. 번뇌망상과 졸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망상과 졸음에 끌려다니면서 몸은 한 곳에 있어본들 어느 세월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랴? 이제 이런 참선은 당분간 뒤로 하고, 신행단체에서 신행활동을 하면서, 여러 중생들과 함께 몸으로 부닥치면서, 넘어지고 일어서고 하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수행을 한 번 해보자. 나는 이런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을 했고, 지금 그 입구에 들어서고 있다. 앞으로 최소한 3년은 이런 수행의 길로 가고자 한다.
3년 후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수행의 과정을 거쳤기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3년 후의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세월의 나이를 먹어서 조금 더 늙어 있겠지, 그 늙은 모습이 아름답게 보일 수 있었음 좋겠다. 왜냐하면 수행을 3년간 한 다음이기에......... 이것도 탐욕이런가? 어리석음이런가? 언제 탐진치 삼독심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어서 맑고 향기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수행의 길로, 고행의 길로 들어서면서............ 원경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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